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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수길암살양부하54

🐦🌿🐍🍁
양부하가 소우시츠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오사카 사천왕사 앞에 일본옷 차림의 모자가 땅에 퍼질러 앉은 채 서로를 붙들고 울고 있었다. 🌲

무슨 곡절인가?

그런데 들리는 말이 조선말이었다.

“에고. 이 자식아. 이제야 만나다니!”

“어머니-. 엉엉...”  

양부하는 말에서 내렸다.🐛

“어쩐 일로 이렇게 길바닥에서 울고 있습니까?”

“내가... 이 아들을 헤어진 지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 이제야 만났어요.”🍄

아들 이름은 대수였다.

대수와 그 어머니는 임진년에 각기 따로 잡혀 왔다.

한양 주변에서 왜적과 싸우던 대수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부대에 잡혔고,

어미는 왜병이 한양에서 철수할 때에 우키다(宇喜多秀家) 부대에 잡혀 끌려왔다. 🐚

그간 오사카에 같이 와 있어도 서로를 몰랐다.  

오늘에 오사카 거리에서 우연히 만났다. 🐪

어미는 오사카 대문사(大門寺) 사찰의 하녀로 있었고 아들 대수는 바늘을 파는 행상이 되어 있었다.  

모자에게 양부하가 다가가서 말했다.🐁

“울음을 그치세요.
조선에서 전쟁은 곧 끝납니다. 고국에 함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어디에 사시는지 거소를 저에게 적어 주십시오. 🌿

나중에 고국으로 돌아갈 때에 함께 갑시다.”

양부하는 이 약속을 지켰다. 🌱
1607년에 여우길 등 1차 통신사가 왔을 때에 양부하는 이 대수 모자가 통신사와 함께 가도록 연락하고 배려했다.⛅

청년 양부하는 후시미성 축조에서 주방 감독을 맡았다.

성 거주 인력이 함께 식사하는 주방의 공사를 맡아 분주히 뛰었다.🌠

“천정까지 빈틈없이 석축을 쌓아요!”

“기둥 수를 배로 늘려 주시오!”

“불이 옮겨가지 않도록 방과 방 사이에 격벽을!” 🐐

그는 완벽한 공사를 추진했다.

다른 시설에 비해 주방은 열악한 것이 통례지만 양부하는 그렇지 않았다. 🐭

조선인으로서 일본인에게 뒤질 수 없었다.

일본에는 지진이 잦았다. 🐵

지진이 없는 조선에서 온 양부하에게 작은 미동 지진도 신경을 곤두서게 했고
때로는 멀미조차 느꼈다. 🐯

웬만한 진동 속에도 태연히 일하는 왜인들의 무신경이 부럽기도 했다.

“그 정도는 지진도 아닙니다.”

“큰 지진은 자주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양부하는 돌기둥을 곳곳에 튼튼히 세웠다. 🌋

위에서 무너져 내릴 때에 대피할 공간도 만들었다.

견고한 시설이 되도록 골조를 튼튼히 하고 다양한 내진 시설을 갖추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