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늘 예천에 왔디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를 보면
예천 쾌빈루가 나온다 🍈
1780년(정조4)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이 예천 군수로 부임했고,
18세의 다산도 함께 가서 아버지를 도왔다 🐞
그 해 가을 정재원 군수는 마을 부로들을 초대하는 큰 잔치를 열었는데 그때 광경을 다산이 기록하였다. (지금은 쾌빈루가 없고 기억하는 이도 없다) 🔵
🐙🎈🍃예천 쾌빈루(快賓樓)에서 연유한 것을 기록한 서 - 다산 🍏
아버지가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부임한 지 수개월 만에, 군의 잘못된 정치와 백성의 고통이 거의 제거되고, 옥송(獄訟)이 일어나지 않고 문부(文簿)가 점차 간편하게 되었다🍍
그러자 쾌빈루에 자리를 베풀고서 시부(詩賦)로 선비를 시험하는데, 수개 군이 다 모여 선비들이 뜰을 메우고, 향대부(鄕大夫=지역 토호 유지)와 천신선생(薦紳先生=지역 명망 유지)이 다 와서 잔치에 참여하였다🌸
안주와 음식이 올려지자, 주묵(硃墨 시험관이 쓰는 주사(硃沙))이 교대로 베풀어진다. 👬
술이 두어 순배 돌자,
어떤 사람이 일어나서 말하기를,
“영남은 동방의 추로(鄒魯)이므로 선비가 추향(趨向)하는 것은 모두 예의(禮義)와 인양(仁讓)의 풍속이고, 외고 익히는 것도 모두 주공정주(周孔程朱)의 서적입니다. 풍속을 따라 다스려야 풍속이 저절로 아름다워지는 것인데, 시부(詩賦)는 소장이 아닙니다. 공은 향음주례(鄕飮酒禮)를 강행(講行)하여 그 덕스런 모습을 살피고 예속(禮俗)을 일으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므로,
아버지는,
“삼가 그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한참 뒤에 어떤 사람이 일어나서 말하기를,
“예악(禮樂)은 반드시 백년을 지나서야 제대로 행해지는 것이니, 왕자(王者)의 정치도 효과가 그렇듯 더딥니다. 그런데 군수는 임기가 오랜 이는 6년이고, 그렇지 않으면 2~3년뿐이니, 아무리 자유(子游)가 정사를 한다 하더라도 1년 안에 어찌 점차로 감화되어 진작하기를 저 사람이 말한 바와 같이 될 수 있겠습니까.
고을 안에 훌륭한 이가 있으니, 지금 동몽교관(童蒙敎官) 박군(朴君) 이름은 손경(孫慶) 그분입니다. 효도와 우애가 돈독하고 경적(經籍)을 정통하였으되, 도리어 겸양하여 후생을 가르치는 일을 즐겨하지 않고 오직 문을 닫고 앉아서 자신의 덕만 수양합니다. 바라건대,
공은 어진 이를 예우하고 선비를 권면하여, 박 교관(朴敎官)에게 독선(獨善)을 영화로 여기지 않도록 하고, 또 선비는 강학(講學)을 폐해서는 안 됨을 알도록 하소서.”
한다.
아버지는,
“삼가 그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이튿날 몸소 박공(朴公)의 집으로 예방(禮訪)하였다😄
향대부(鄕大夫=명망유지)는 좌랑(佐郞) 박지경(朴趾慶), 좌랑 신완(申完), 좌랑 변득룡(邊得龍)이다🍫🌘🍎
이렇게 정재원처럼 겸손히 지역민을 섬기는 정치인이 요즘 얼마나 될까?
모두 제 잘난 줄만 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