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기(尹愭)의 무명자집 시고 제2책
시(詩)에 언양 선비 서석린의 일대기가 적혀 있다
호랑이와 도적을 감화시킨 향산(香山=언양) 서 진사(徐進士)의 효성
〔嶺南金上舍 龍翰 爲余言 其師香山徐進士 錫麟 掌令甄之後也
其喪親也 廬墓六年 有大虎每夜來伏山下
癸丑大歉 僧適負其行裝以行 盜群聚欲劫之 聞其爲徐孝子物 乃脫其衣以與僧 僧亦不受 相持者久之 皆感物之異也
平生用工於勤謹忍默和緩安詳八字 有著述十餘卷
晩年混迹漁樵 自號睡聱 旣沒 鄕人爲俎豆之云 權進士煒詩以詠之 和者甚多
余亦步其韻 以贈金上舍〕
영남의 김 상사(金上舍)- 용한(龍翰) - 가 내게 말하기를, 그의 스승인 향산의 서 진사 - 석린(錫麟) - 는 장령(掌令) 서견(徐甄)의 후손으로, 어버이 상을 당했을 때 6년 동안 여묘(廬墓) 살이를 했는데, 커다란 호랑이가 매일 밤 무덤 밑에 와서 꿇어앉아 웅크리고 있었다고 한다.
또 계축년(1733, 영조9)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중〔僧〕이 서 진사의 행장을 짊어지고 가고 있었는데 도적 떼가 모여들어 뺏으려다가 효자인 서 진사의 물건이라는 말을 듣고는 도리어 제 옷을 벗어 중에게 주려 하고 중은 받지 않으려고 하여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였다고 한다.
이는 모두 동물과 사람을 감화시킨 기이한 일이다.
서 진사는 평생 ‘근면〔勤〕’ㆍ‘조심〔謹〕’ㆍ‘인내〔忍〕’ㆍ‘침묵〔默〕’ㆍ‘온화〔和〕’ㆍ‘느긋함〔緩〕’ㆍ‘찬찬함〔安〕’ㆍ‘꼼꼼함〔詳〕’ 등 여덟 가지 덕목을 노력하였고 10여 권의 저술을 남겼으며, 만년에는 어부ㆍ초동과 어울려 지내며 스스로 수오(睡聱)라고 불렀는데, 별세한 뒤에 고을 사람들이 제사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진사 권위(權煒)가 시를 지어 이를 노래하자 화답한 사람이 매우 많았는데 나도 그 시에 차운하여 김 상사에게 준다. - 서 장령에게는 후사가 없는데 여기에는 이렇게 말했으니,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다. -
온 세상이 다 아는 고려 시대 서 장령(徐掌令) / 高麗掌令世皆知
먼 후손인 공께서 그 인품을 물려받고 / 公以雲仍獨遠師
어부며 초동들과 소탈하게 교유하니 / 漁樵指點香山社
고을에서 찬탄하며 제사를 올리누나 / 鄕里咨嗟畏壘祠 🐢🐒
여묘(廬墓) 곁에 호랑이🐯가 꿇어앉아 웅크리고 / 廬墳虎跪攀號地
행장 뺏던 도적이 되려 예를 갖췄으며 / 劫槖盜行揖讓儀
여덟 덕목 깊이 닦고 열 권 저술 남기신 일 / 八字深工留十卷
서로 함께 수학할 때 문인이 말해주었네 / 門人爲說講磨時
[주-D001] 호랑이와 …… 효성 :
본서의 편차 순서로 보아 작자 나이 51세 때인 1791년(정조15) 4월의 작품이다.
향산(香山)은 경상도 언양(彦陽)의 이칭이다.
서석린(徐錫麟, 1710~1765)은 자는 몽응(夢應), 호는 수오(睡聱)ㆍ관서부자(關西夫子), 본관은 이천(利川)이고, 경상도 언양 출신이다.
그는 38세(1747, 영조23)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하다가 3년 만에 과거 응시를 단념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에 전념하며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46세(1755, 영조31)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으며, 사후인 1785년(정조9)에 상산사(商山祠)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수오선생문집(睡聱先生文集)》 7권 3책 및 김천상(金天相)과 함께 편수한 《언양읍지(彦陽邑誌)》가 있다.
작자보다 31세 연상이다.
이 시는 김용한에게 들은 서석린의 소탈하고 효성스러운 행적 및 학인(學人)으로서의 면모를 읊은 것이다.
평성 ‘支’운으로 제1구(知)ㆍ제2구(師)ㆍ제4구(祠)ㆍ제6구(儀)ㆍ제8구(時)의 운을 맞추었고, 제1구의 제2자(麗)가 측성인 측기식 수구용운체 칠언율시이다.
[주-D002] 영남의 김 상사(金上舍) :
김용한(金龍翰, 1738~1806)이다. 자는 운익(雲翌),
호는 염수헌(念睡軒),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경상도 언양 출신으로, 52세(1789, 정조13)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작자보다 3세 연상이며 성균관 16년 후배이다. 이해(1791, 정조15) 4월 17일 일차 유생 전강(日次儒生殿講)을 실시하면서 거재유생(居齋儒生)들에게 보인 제술 시험에서 윤기(尹愭)가 표(表)에서 삼하(三下)의 점수로 수석할 때, 그는 부(賦)에서 초차상(草次上 합격자 명단에 초서로 ‘次上’이라고 쓰는 점수. 차상은 차상인데 정자(正字)로 쓴 차상보다 등급이 낮음)의 점수로 예비합격자 명단에 들어 수상(受賞)하였다. 《承政院日記 正祖 15年 4月 18日》
[주-D003] 서견(徐甄) :
고려 말의 문신으로, 본관은 이천(利川)이고 1369년(공민왕18)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고려의 마지막 해인 1392년(공양왕4)에 사헌 장령(司憲掌令)으로서 조준(趙浚)ㆍ정도전(鄭道傳)ㆍ남은(南誾) 등 이성계(李成桂) 일파를 탄핵하다가 유배되고, 조선 건국 이후에는 금천(衿川)에 은거하며 고려에 대한 절의를 굳게 지킨 인물이다. 《陶菴集 卷38 高麗忠臣掌令徐先生墓表》
[주-D004] 서 …… 모르겠다 :
이 원주는 작자가 쓴 본문에 대한 이견을 밝힌 내용이므로, 작자 사후에 쓰여진 것이다.
[주-D005] 어부며 …… 교유하니 :
원문은 ‘漁樵指點香山社’로, 본디 ‘어부와 초동들이 향산사를 가리켰다’는 말인데, 서석린이 미천한 사람들과 소탈하게 교유하였다는 뜻이다.
‘香山社’는 본디 당(唐)나라의 향산거사(香山居士) 백거이(白居易)가 불교도(佛敎徒)의 모임인 향화사(香火社)에 참여했기 때문에 붙은 향화사의 이칭인데, 여기서는 서석린이 만년에 고향 향산(香山 언양)으로 돌아가 어부ㆍ초동들과 함께 어울리며 지낸 것이 백거이의 행적과 유사하기 때문에 그에 비겨 말한 것이다.
[주-D006] 고을에서 …… 올리누나 :
원문은 ‘鄕里咨嗟畏壘祠’로, 본디 ‘향리 사람들이 외루사를 찬탄한다’는 말인데, 고을에서 서석린의 행적에 찬탄하며 제사를 지내주고 있다는 뜻이다.
‘畏壘祠’는 노자(老子)의 제자 경상초(庚桑楚)가 노자의 도(道)를 듣고 외루산(畏壘山)에 은거한 지 3년 만에 그곳 백성들이 그를 존경하여 제사를 지내주려 했다는 고사(《莊子 庚桑楚》)를 원용하여 서석린의 경우를 빗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