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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봉스님

🔮🍅🍌
38세 늦깎이로 삭발 출가하여 우리나라 불교의 대표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 종정까지 지내신
효봉(曉峰)스님은

구산(九山)스님과 법정(法頂)스님의 은사로 잘 알려져 있다.🍠

1888년 평안남도 양덕군에서 태어난 스님은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나와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판사가 되었고 🌲

평양 복심법원에 근무하다가 ‘사형선고’
내린 것에 회의를 품고
홀연 가출했다 🍈

부귀영화를 미련 없이 내던지고 엿장수로
변신하여 3년여를 떠돌다가
나이 38세에 금강산 신계사 보문암에서
석두화상을 은사로 삭발 출가하였다.🐚

평생토록 무(無)자 화두를 들고 참구했던 효봉스님에게는
‘엿장수 중’,
‘판사 중’,
‘절구통 수좌’,
‘너나 잘해라 스님’등
별명도 많았는데,

별명 마다에는
다 그만한 사연이 있다   🌍

첫 번째 얻은 별명
‘엿장수 중’은
효봉스님이 평양에서 잠적, 가족에게도 행방을 알리지 않은 체 서울로 내려와 양복을 벗어서 판돈으로 엿판을 마련하고 엿장수가 되어 정처 없는 방랑길을 걷다가 나중에 엿판을 짊어진 체 금강산에 들어가 삭발 출가해 얻은 별명.
                                  
스님은 출가 당시 당신의 학력과
과거 행적을 완전히 숨기고 오직
‘못 배운 엿장수’였다고 자신을 소개했으므로
모두들 스님을
‘엿장수 중’으로 불렀다.  🐲

​ 그 후 같은 법원에 근무했던 일본인 판사가 관광차 절에 왔다가 우연히 스님과 조우, 그동안 숨겨왔던 판사 전력이 알려지게 되었다.  😨🍒

이때부터 스님은 ‘판사 중’으로 불리게 되었고
사찰의 법률문제만 생기면 효봉스님을 찾게 되었다.

이에 스님은 이 일이 번거로워 금강산을 떠나 남행길에 오르게 되었고
그 덕택에 남북분단 후 이 나라 불교계의
지도자가 되었다.  🐢

‘절구통 수좌’라는 별명은,
수행을 했다 하면
절구통처럼 꼼짝하지 않고
철저히 했으므로 엉덩이가 짓물러 깔고 앉은 방석이 엉덩이에 달라붙을 정도였다. 그래서 지독한 수좌라는 뜻에서 절구통 수좌로 불렀다.☔

​ 이 땅에 6·25 동란이 일어난 후 해인사에까지
인민군의 발길이 뻗쳐 왔다.
모두들 피난을 갔지만
효봉 스님 자신과 효봉스님을
모시던 구산, 법흥, 원명, 보성 등 효봉스님의 문도들만
해인사에 남았다.

​제자들이 피난을 가자고
말씀드려도 스님은
한사코 당신이 해인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니 제자들에게만 피난을 가라고 하였다 🎃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를 차단당한 인민군들이 산속으로 숨어들어 비정규적인 유격전을 벌이느라 사찰이나 암자까지도 무사하지 못했다.🐔

​“스님, 어서 피난을 가십시다요.”

“늙은 중이야 별일 있겠느냐.
너희들이나 어서 피하거라."

​“스님께서 떠나지 않으시면
저희들도 피난가지 않겠습니다.”

“이것 보아라.
우리 해인사에서 키우던 소, 저 소를 버리고 어찌 사람만 피난을 갈 수 있겠느냐? 나는 절에 남아서 저 소 여물을 쑤어 먹이고 있을 것이니
너희들이나 어서 떠나거라."   🏂

이렇게 한사코 피난을 거부했다.

그리고 결국 그날 밤 해인사는 패잔병들의 습격을 받고 문제의
그 소를 빼앗겼다.
패잔병들이 잡아먹기 위해 총으로 위협,
소를 빼앗아 산속으로 끌고 가버렸다.🌅

​소를 돌보기 위해 피난도 가지 않던 효봉스님은 망연자실…
다음날 별 수 없이
제자들의 성화에 이끌려
피난길에 나서게 되었는데 효봉스님은
몇 번이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소가 우리 대신 죽었구나.
그 소가 우리 대신 죽었어.”     ⭕

효봉 스님은 제자들과 함께
피난길에 올라
부산을 거쳐 배를 타고
전라도로 가기로 했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통영 여수를 거쳐
해남 대흥사로 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도중에 뱃멀미를 하게 된 스님이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통영에서 일단 배를 내려 쉬어 가기로 했다. 그런데 통영 용화산에 도솔암이라는 암자가 마침 비어 있었다. ⚪

이 도솔암에서 며칠 쉬었다 갈 요량이었는데 주저앉은 김에 아주 눌러 살게 되었다. 참으로 묘한 인연이었다.

효봉스님이 구산, 원명, 보성, 법흥, 인각 등 제자들과 함께 이 도솔암에서
머물며 정진하고 있으니
뒤이어 소문을 듣고 완산, 경산, 범용, 경운, 탄허, 성수 스님 등 한국불교계의 거물들이 줄줄이 내려와
머물게 되었으니
통영 도솔암은 한국 불교계의 거봉을 배출한 요람이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