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던
다음해
어느 여름날,
영산(靈山)에 사는 한 젊은이가 이
불밋골에 풀을 베러 갔다.
젊은이는 부지런히 소꼴 한 짐을
다 해놓고 땀을 닦으면서 골짜기 샘으로 내려가다가
그만 잘못하여 발을 헛디뎌 옆에 있는
함정 속에 빠지고 말았다.
한참 후 젊은이가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거기에는 이상하고 꿈같은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분명 아주 깊은 땅속으로 떨어졌는데
넓고 밝은 또 하나의 세상이 있었던 것이다.
열 개가 넘어 보이는 대장간과 풀무간이
쭉 늘어 서 있고 자기 또래의
젊은이들이 열심히 쇠붙이를 다루고 있는 것이었다.
젊은이는 꿈인지 생시인지를 몰라
우두커니 서 있으니 한 노인이 가까이 와서,
"잘 왔구먼! 지금부터 여기서 우리와
같이 일하는 거다"
하였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지내보면 알겠지만 장래 왜군이 다시 쳐들어 올 걸세. 우리는 그때를 대비해서 무기를 만들고 있네."
그 때부터 젊은이는 지하 세계 대장간 일꾼의 한 사람으로 열심히 일했다. 그저 낮도, 밤도 없는 세계에서 일만하고 있을 뿐 다른 생각은 없었다.
한편 소꼴을 베러 나간 젊은이가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와도 돌아오지 앉자 집안사람들이 산으로 찾아 나섰다.
그러나 지게에 꼴만 한 짐만 지워 놓았을 뿐 사람은 흔적도 없었다
.달이 가고 해가 바뀌어도 나간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가족들은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꼴 베러 나간 그 날짜로 제사를 지냈다.
한편 오늘도 열심히 불밋골에서 일하고 있는 젊은이를 그 노인이 가까이 부르더니
자기를 따라 나오라고 했다.
그 동안 수고가 많았다며 오늘부터 바깥 세상에 나가 살라고 하더니
커다란 바위를 보며 주문을 외우니
곧 길이 열렸다.
그 길을 따라 나오니 지난번 소꼴을 베던 그 자리였고 우거진 나무와 풀만이 한여름 저녁바람에 살랑거리고 있었다.
젊은이는 그제서야 자기가 소꼴을 베려왔던 일, 함정에 빠졌던 일, 그리고 가족들이 기다렸겠느냐하는 생각이 들어
바쁜 걸음으로 자기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집도 달라졌고 모두가 낯선 사람뿐이었다. 젊은이는 자기의 이름을 대고 아내를 말해 보았지만 모두들 미친 사람의 잠꼬대쯤으로 생각하고 상대해 주지도 않았다.
젊은이는 하는 수 없이
자기 성을 가진 그 동네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노인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그 노인은 고개를 몇 번 갸우뚱거리면서,
"옛날 우리 할아버지뻘 되시는 분이 그 집에서 살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네만… "
젊은이는 어느 것이 꿈이고
생시인지도 모른 채,
올데 갈데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