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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루 기문

🏃🐤🐦
오늘 태화루에 왔습니다

태화루 창방에 일찌기 조선 태종 때 대학자로 관학의 시초 권근이 쓴 태화루 기문이 붙어 있습니다 🚂

그런데 지금까지 울산에서 누구도 이 기문의 번역문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

제가 최초로 기문의 번역문을 올립니다🍐
(이제야 기문 내용이 뭔 소리 인지 알게 됩니다)

🍑💃🌸
○權近記:“蔚爲州東南際巨海,去王京最遐。距州之西數里有大川,南流東折而入海。其東折也,水尤宏闊而澄深,曰黃龍淵。其北,石崖截然壁立,南迤而東迴,有山巋然峙于水南,名葩異卉,海竹、山茶,經冬馥郁,曰藏春塢。
🍏
新羅之時,始置寺于北崖之上,曰大和。西南起樓,下臨淵水,山橫野外,海接天涯,登覽之美,最爲奇勝。
🌺
建文元年 己卯春,今國舅驪興伯閔公霽奉使至此,觀其南樓已廢,西亦腐撓,駐節彷徨,顧瞻咨嗟,慨然有新構之志,及還于朝,未嘗暫忘。🔋
越三年辛巳春,判事安君魯生出按是道,詣公辭。公語其事,
安君對曰:‘敢不蚤夜新起此樓,以無忘公勤?’ 旣之部,令行政肅,乃募游手,乃斲乃陶。
🐐
知州 孫君光衍悉力監督,不煩于民,不月而營,規模制度視舊益壯。
🌅
其秋,驪興公(민제)又奉御胎,將安于星山,
謂予曰:
‘樓臺、亭觀之設,雖若無關於政治,然時游觀、節勞逸,無國無之。蔚之大和樓,固一方之奇勝也。予惜其廢毁,若有累於治平之世,常囑按部,已新之矣。今予又奉使往其道,是不可無文以記。子無讓!’
🐎
予惟此樓聞於國中久矣。然以其在於窮遐絶塞之上,故其登覽嘯詠者,非廢棄羈旅之士,則按轡剖符典一方、宰一邑者爾。

其居宰執、近密者,一往過之亦鮮矣。況以國舅之尊,秩崇侯伯,又嘗位冢宰、摠百揆如公之比者,一二年間節鉞再臨?自有此樓以來,不知亦嘗有乎否也?公風神淸郞,襟韻超逸,文行節義,表儀朝著,雖處富貴,而雅淡閑適之趣不少變。
🐙
吾想夫公之登斯樓也,灑落之懷,與風月雙淸;恢廓之量,與海天同大。
💃
此公所以樂之而不忘也。公推此心,以與一國同樂,吾民其庶幾乎。吾安得陪公而往,從公之後,登臨寓目,觴詠於其上,而備記其勝槪乎?”

🐞🐋🐎🍓번역본💃🐢🐛🐝

○ 권근(權近)의 기문에 이르기를,
“울산 고을은 동쪽과 남쪽으로 큰 바다에 접해 있고, 서울과의 거리가 가장 멀다. 고을 서쪽 수 리나 되는 곳에 큰 내가 남쪽으로 흐르다가 동으로 꺾이어 바다로 들어간다.

그 내가 동으로 꺾이는 곳에 물이 더욱 넓고 깊으니 이곳을 황룡연(黃龍淵)이라 한다.

그 북쪽에 돌 언덕이 깎은 듯이 벽처럼 섰으며, 물이 다시 남으로 구부러지고 동으로 도는 곳에 산이 높다랗게 있어 물 남쪽에 버티고 섰는데, 이름 있는 꽃과 이상한 풀, 해죽(海竹)과 산다(山茶)가 겨울에도 무성하여 이를 장춘오(藏春塢)라고 한다.

신라 때에 비로소 절을 이 북쪽 언덕에 세우고 대화(大和)라 하였는데, 서남쪽으로 누각을 이루었고 아래로는 못에 임했으며, 산은 들 밖으로 비껴나가고, 바다는 하늘가에 닿아 있어 여기 올라가 구경하는 아름다운 경치가 가장 기이하고 빼어나다.

건문(建文) 원년 기묘년 봄에 지금 국구(國舅)인 여흥백(驪興伯) 민제(閔霽)공이 사신으로 여기에 왔다가, 그 남쪽 누각이 이미 허물어진 것과 서쪽 역시 썩어 기울어진 것을 보고 사절을 머물고 주저하며 바라다 보다가 탄식하던 끝에 개연히 새로 지을 뜻을 가졌다.

조정에 돌아와서 잠시도 이를 잊지 못하더니, 3년 후인 신사년 봄에 판사 안로생(安魯生)군이 나가 이 도(道)를 관찰하게 되어 공에게 가서 작별하니 공이 그 일을 말했다. 이에 안군이 대답하기를, ‘어찌 감히 주야로 이 누각을 새로 세워서 공의 부탁하심을 잊으오리까.’ 하였다. 임소에 가서 법령이 행해지고 정사가 엄숙하게 되므로, 이에 노는 인부들을 모집해서 깎고 다듬어 이 누각을 세웠다.

지주(知州) 손광연(孫光衍)군이 힘을 다하여 일을 감독해서 조금도 백성들에게 번잡스럽게 하지 않고서 한 달도 못되어 이루었는데 그 규모와 제도는 옛것 보다 더욱 웅장했다.

그 해 가을에 여흥공이 또 어태(御胎)를 받들고 성산(星山)에 안치하려 할 적에 나에게 말하기를, ‘누대나 정자를 시설하는 것이 비록 정치에는 관계가 없을 것 같으나, 때로 이런 데 가서 놀고 구경하여 수고롭고 편안한 것을 조절하는 것은 없는 나라가 없다. 더욱이 울산의 대화루는 진실로 한 지방의 빼어난 곳인지라, 내가 대화루가 없어지고 허물어짐이 태평스럽게 다스리는 세상에 누가 될 듯함을 일찍이 애석하게 여겨서 안부(按部)에 부탁해서 이미 새롭게 했고, 이제 내 또 사신으로 그 도(道)에 가게되니, 글을 지어 기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대는 사양치 말라.’ 하였다.
내 생각건대 이 누각은 국중에 이름이 난 지 오래다. 그러나 궁벽하고 먼 변방에 있는 까닭에 여기에 올라가 놀고 글을 읊는 사람은 세상에서 버림을 받았거나 손으로 온 사람이 아니면, 말고삐를 잡고 벼슬에 임명되어 한 지방을 맡고 한 고을을 다스리는 자뿐이요, 재상이나 임금의 친근한 자로서 한번 가본 사람이 또한 드물 것이다.

하물며 국구(國舅)의 높은 몸으로 계급이 높은 후백(侯伯)이며, 또 일찍이 총재(冢宰)의 자리에 있어 백관을 거느리는 공 같은 분이 1ㆍ2년 사이에 관찰사의 임명을 받아 두 번씩 온다는 것은 이 누각이 생긴 이후로 이런 일이 또 있었겠는가.

공(민제)은 풍모가 맑고 명랑하며 흉금이 뛰어나고, 문행(文行)과 절의(節義)가 조정에 모범이 되어, 비록 부귀에 처해 있으면서도 아담하고 한적한 취미를 조금도 변치 않았다.

내 생각건대 공이 이 누각에 오르면 시원한 회포는 바람과 달같이 맑고 넓고, 넓은 도량은 바다나 하늘과 함께 큰 것이니, 이야말로 공이 즐겨하고 잊지 않던 것이다.

공은 이 마음을 미루어 온 나라와 함께 즐겁게 하여 우리 백성들이 잘 다스려졌을 것이로다. 내가 어떻게 공을 모시고 가서 공의 뒤를 좇아 그 누각에 올라 구경하고 그 위에서 술 마시고 글 읊어서 그 좋은 경치를 낱낱이 기록할 수 있을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