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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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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드라마 이방원을 보니 세자 양녕과 충녕의 갈등이 대단한데 역사에서는 그런 갈등이 없었다

충녕(후일 세종)과 양녕은 원래 좋은 사이였고 양녕이 아비 이방원(태종)의 숨은 충녕 사랑 뜻을 알고 스스로 왕위를 버린 것이다

아버지 태종도 양녕을 폐한 뒤에 양녕의 아들을 세자로 세우려고 했는데 신하들이 반대하여 충녕을 세운 것이다.

태종도 양녕의 호협함을 사랑하였으니 일화도 있다.

원경왕후의 동생인 민무질 민무구가 양녕과 원수였다 함은 무척 생소하다

🐢🐅🐝이하 관련 자료🐤🐞🐎

○ 양녕대군은 세자가 되었을 때, 태종의 뜻이 세종에게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미친 체하고 사양하니, 태종이 결국 폐하고 세종을 세웠다.

양녕이 능히 때에 따라 자기의 재주를 감추어 드러내지 않고 이럭저럭 지냈기 때문에 내외(內外)ㆍ상하(上下)에 모두 환심을 얻었고,세종도 양녕을 높이고 사랑하여 매양 대궐로 맞아들여 술을 대접하고 거의 매일 서로 즐겼다. 여러번 잔치하는 기회를 가졌고 양녕이 사냥을 좋아하므로 세종이 여러번 성 밖으로 나가 함께 하니, 지극한 정이 한이 없었다. 세조(世祖)가 임금이 된 뒤에 왕자와 대신이 많이 죽음을 당하였지만,양녕은 능히 지혜로써 스스로를 보전하였고, 세조도 혐의없이 높이 대우하니, 사람들은 그가 임금 자리를 사양하여 어진 이에게 밀어 주고 끝까지 몸을 잘 보전한 것이 참 대단하다 하였다. 《자해필담(紫海筆談)》

임금(태종)이 이제(양녕)의 맏아들을 후사(세자)로 세우려고 하니, 여러 신하가 모두 아뢰기를, “전하께서 세자를 교양시킴이 지극하였는데도 오히려 이렇게 되었는데, 지금 어린 손자를 세우면 어찌 뒷날을 보존하겠습니까. 더군다나 아비를 폐하고 아들을 세우는 것이 옳겠습니까.어진 이를 가려 세우시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경들이 어진 이를 아뢰어라.” 하니, 모두 아뢰기를, “아들을 알아보고 신하를 알아보는 데는 임금이나 아버지같은 이가 없습니다. 분별하는 것은 성상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충녕군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며,학문을 좋아하여 게으르지 않고, 몹시 춥고 몹시 더운 때라 하더라도 밤이 늦도록 책을 읽어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며 정사하는 체통에 통달하므로 내가 충녕을 세자로 삼으려고 한다.” 하니, 여러 신하가 하례하기를, “신들이 어진 이를 가리시라는 것도 충녕을 지목한 것입니다.” 하였다. 의논이 결정되어 곧 충녕을 세자로 세웠다. 《국조보감》

양녕은 젊어서부터 문장을 잘 하였으나, 세종에게 성덕(聖德)이 있음을 보고 짐짓 글을 모르는 체하고 미친 체하여 방자히 놀았기 때문에 태종도 글하는 줄을 알지 못하였다.
늙은 뒤에 중의 시축(詩軸)에 쓰기를

산 안개로 아침밥 짓고 / 山霞朝作飯
담쟁이 덩굴 사이로 보이는 달로 등불삼네 / 蘿月夜爲燈
외로운 바위 아래 홀로 누워 밤새우니 / 獨宿孤巖下
오직 탑 한층이 있으매라 / 惟存塔一層
하였다.
비록 문인(文人)이라도 필시 이보다 낫지 못할 것이다. 《자해필담》

○ 양녕이 비록 실덕(失德) 하여 폐함을 당하였지만 미친 체하고 방랑하는 것이 실로 태백(泰伯)과 같았다. 지금 남대문 현판인 숭례문(崇禮門) 석 자는 그가 쓴 글씨로서, 웅장하고 뛰어남은 그의 사람됨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축수편》

○ 처음에 양녕이 미친 체하고 방랑하니 효령대군이 장차 그가 폐위될 것이라 짐작하고, 깊이 들어 앉아 삼가고 꿇어앉아 글을 읽었다. 이는 양녕이 폐위되면 다음 차례로 세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양녕이 지나다가 들어와서 발로 차면서 말하기를,
“어리석다. 너는 충녕에게 성덕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였더니, 효령이 크게 깨닫고 곧 뒷문으로 나가 절간으로 뛰어가서는 두 손으로 북 하나를 종일 두드려 북 가죽이 부풀어 늘어났다. 지금까지 세속에서는 부드럽고 늘어진 것을 보고, “효령대군 북가죽이다.” 하는 말이 전하여 온다.

○ 양녕은 타고난 자품이 너그럽고 활달하였고 평소에 자기 몸을 잘 길러 주색(酒色)과 사냥 이외에는 한 가지도 손을 대지 않았다. 그의 아우 효령대군 이보(李補)가 부처를 좋아하였는데, 일찍이 불사(佛事)를 하고 양녕을 청하였다. 양녕이 사냥꾼과 활쏘는 사람을 거느리고 가서 토끼와 여우를 잡게 하고,자기는 가서 불사에 참여하였다. 조금 뒤에 사냥꾼은 짐승을 가져 오고, 음식 만드는 사람은 고기를 구어 오고, 모시는 사람은 술을 가져왔다. 그때 효령이 부처에게 절 하고 머리를 조아렸는데, 양녕은 고기를 씹고 술을 마시면서 아무렇지 않은 듯 하였다. 효령이 정색하고 청하기를, “형님께서 오늘만이라도 술과 고기를 그만 두시지요.” 하니,양녕이 웃으면서 답하기를, “나는 평소에 하늘이 복을 많이 주셨기 때문에 고생을 하지 않는다. 살아서는 왕의 형이고, 죽어서는 부처의 형이다.” 하였다. 부처라는 말은 효령을 지목한 말이다. 《추강냉화(秋江冷話)》

○태종이 양녕을 돌아보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네가 달아난 뒤에 생사를 알지 못하여 항상 눈물을 흘렸고 주상(세종)도 곁에서 늘 눈물을 흘렸다. 만일 네가 편안히 있는데 여러 아우에게 사고가 있으면 네가 주상(세종)의 우애와 같이 하겠느냐.’ 하시고, 상왕(태종)이 꾸짖으면서도 죄는 주지 않았다. (동각잡기)

○ 임금이 감나무를 대궐 안에 심고 그 열매를 구경하였는데, 까마귀가 와서 쪼아 먹으므로 태종이 탄자(彈子) 잘 쏘는 사람을 구하여 쏘라고 하였다. 좌우에 모셨던 사람이 모두 아뢰기를, “조정 무관[朝中武夫]에는 마땅한 사람이 없고 오직 세자라야 쏠 것입니다.” 하므로,
임금이 양녕을 시켜서 쏘라고 하였더니 두 번이나 맞추었으므로 좌우가 모두 하례하였다. 임금이 전에 양녕의 행실을 미워하여 오랫동안 보지 않았는데, 이날 처음으로 빙그레 한 번 웃었다. 《용재총화》

○ 김호생(金好生)이라는 선비는 붓을 잘 만들었다. 양녕이 잡것들을 많이 몰아들여 장난을 하고 체면을 차리지 못하므로, 양녕과 같이 놀던 자를 혹 죽이기도 하고 혹 귀양도 보내었다. 어느날 호생이 붓을 가지고 세자궁 문앞에 이르렀다가 내사(內使 상감이 보내는 내시)에게 잡혀 어전(御前)에서 신문을 당하여 호생이 사실대로 대답하니,임금이 이르기를, “네가 외인(外人)으로서 세자궁(世子宮)에 드나들었구나. 네가 세자의 붓만 만들었으니 나의 붓도 만들어야 한다.” 하고, 공조로 내보내어 필장(筆匠)을 삼았다. 《용재총화》

양녕대군이란 훌륭한 우리 역사 인물을 편협한 자로 왜곡하면 안 된다.
그가 세종보다 뛰어난 인물인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