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卷二十三
慶尙道
彦陽縣
東至蔚山郡界十九里。南至梁山郡界二十一里。西至密陽府界二十八里,至淸道郡界三十一里。北至慶州府界十三里。距京都八百四十七里。
💝建置沿革
本新羅居知火縣。景德王改巘陽,爲良州領縣。高麗顯宗屬蔚州。仁宗置監務,後改今名。本朝因之,爲縣監。
🎎官員 縣監,訓導。各一人。
🎓郡名
居知火,巘陽,巘山。
🌎姓氏
本縣 朴,金。玄,崔,金。竝來。
🌕山川
高巘山。在縣北十里。鎭山。
鷲棲山。在縣南十二里。一名大石山。
石南山。在縣西二十七里。
穿火峴。在縣西二十八里。密陽府界。
夫老山。在縣南五里。
松洞。在縣北二里。○金就礪少遊之地,手種松至今猶在。或云墓在洞內,今無所考。
🐌南川。
在縣南一里。源出石南山,入于蔚山郡大和津。
鷲城川。在縣南十里。源出大石山,與南川合流,入于大和津。
🚨〔新增〕 加士峴。在縣西三十一里。淸道郡界。
🚘土産
鐵,出石南山。香蕈,松蕈,石蕈,石淸蜜,地黃,苽,出北城底。其種出於京藉田,故名藉田苽。每歲冬月種之,四月晦前進獻,其種養甚難,成宗初罷之。銀口魚,黃魚,石榴。〔新增〕 竹箭。
城郭
邑城。土築。周一千四百九十八尺,高八尺。內有井二。〔新增〕 弘治庚申改石築。周三千六十四尺,高十三尺。內有三井。
烽燧
夫老山烽燧。南應梁山郡圓寂山,北應慶州所山。
🚣👩驛院
德川驛。在縣南五里。
新院。在縣南十九里。
猪村院。在縣南二十四里。
于川院。在縣北十一里。
石南院。在石南山下。
普通院。在縣東一里。
❄佛宇
石水寺。在夫老山。
連高寺。在高巘山。
👿祠廟
社稷壇。在縣西。
文廟。在鄕校。
城隍祠。在縣北七里。
厲壇。在縣北。
🐢人物
高麗 金就礪。官至侍中。爲人節儉正直,忠義自守。持軍嚴整,士卒不犯秋毫,有酒卽用一巵,與最下者均飮,故得其死力。江東之役事,皆讓於趙冲,至臨陳制敵,多出奇計以成大功,然未嘗自矜。爲相正色率下,人不敢欺。諡威烈。
金文衍。爲人豁達無迂曲。累官至僉議中護。諡榮信。
🍒金賆。登第,官至僉議參理。性純厚無華,奉公以正。
金倫。賆之子。忠烈朝哈丹來寇,國人入江華避之。倫外舅許珙令倫挈家先歸,倫年十四,指畫如成人,一族賴之。以蔭補官累轉慶尙、全羅道都巡問使,鎭合浦,號令嚴明,吏民安輯。忠穆朝陞左政丞,未幾乞退。後王欲請忠惠諡,召倫遣之,倫謝曰:“臣桑楡之年七十又二,恐顚隮道路,以辱明命。然喘息尙存,敢不黽勉?” 退而理裝。將如元,忽得風疾,十日不飮水漿,令左右扶起,具衣冠端坐而逝。諡貞烈。官至守司徒、上柱國、彦陽伯。
🐮🚢📛
本朝 金赭。丙申年覆試狀元,官至參判。
🌷孝子
高麗 辛繼誾。
爲父母前後居廬六年。
鄭宗文。父母相繼死,哀毁過禮,居廬三年。
鄭尙仁。父早死,爲祖~父母廬墓三年,凡葬祭一依《家禮》。又爲其師吉再心喪三年,人皆敬服。
🌕烈女
本朝 鄭氏。新寧監務柳惠至妻也。惠至死,廬墓三年。太宗朝旌表門閭。
🐛題詠
山水盤迴作一鄕。洪汝方詩:“松篁掩映藏千戶,云云。”
近郭山高多暮靄。李知命詩:“云云,傍簷樹密産秋涼。”
帶雨新荷疊水涼。權孟孫詩:“含風紅藥飜階嫩,云云。”
山形北控羅都去。徐居正詩:“云云,水勢東傾蔚海流。”
🌎🐮🐧[번역문]🐚🍄🐟
언양현(彦陽縣)
동쪽으로 울산군(蔚山郡)의 경계까지 19리, 남쪽으로 양산군(梁山郡) 경계까지 21리이고, 서쪽으로 밀양부(密陽府) 경계까지 28리, 청도군(淸道郡) 경계까지 31리이며, 북으로 경주부(慶州府) 경계까지 13리이고, 서울까지의 거리는 8백 4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거지화현(居知火縣)으로 경덕왕(景德王) 때, 헌양헌(巘陽縣)으로 고쳐 양주(良州)의 속현으로 했고, 고려 현종 때 울주(蔚州)에 예속시켰다. 인종(仁宗) 때 감무(監務)를 두었고 뒤에 지금 이름으로 개칭하였는데, 본조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하고, 현감을 두었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거지화(居知火)ㆍ헌양현(巘陽縣)ㆍ헌산현(巘山縣).
【성씨】 본현 박(朴)ㆍ김(金), 현(玄)ㆍ최(崔)ㆍ김(金) 모두 내성(來姓)이다.
【산천】 고헌산(高巘山) 현의 북쪽 10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취서산(鷲棲山) 현의 남쪽으로 12리에 있으며, 대석산(大石山)이라고도 한다. 석남산(石南山) 현의 서쪽으로 27리에 있다. 천화현(穿火峴) 현의 서쪽 28리에 있으니, 밀양부(密陽府)와의 경계이다. 부로산(夫老山) 현의 남쪽으로 5리에 있다. 송동(松洞) 현의 북쪽으로 2리에 있다. ○ 김취려(金就礪)가 어릴 때 놀던 곳으로, 손수 심은 소나무가 아직도 있으며, 혹은 무덤이 송동의 안에 있다고도 하지만 지금은 알 길이 없다. 남천(南川) 현의 남쪽으로 1리에 있으며, 물의 근원은 석남산에서 나와서 울산군(蔚山郡) 대화진(大和津)으로 흘러 들어간다. 취성천(鷲城川) 현의 남쪽으로 10리에 있으며, 물의 근원은 대석산에서 나와서 여남천(與南川)과 합류하여 대화진으로 흘러 들어간다.『신증』 가사현(加士縣) 현의 서쪽 31리에 있으니, 청도군과의 경계이다.
【토산】 쇠 석남산에서 난다. 표고[香蕈]ㆍ송이[松蕈]ㆍ석이버섯ㆍ석청[石淸蜜]ㆍ지황(地黃),
참외[苽] 북쪽 성 밑에서 난다. 그 종자가 서울의 적전(籍田 임금이 손수 경작하는 밭)에서 나왔으므로 적전 참외[籍田苽]라고 한다. 매년 겨울철에 심었다가 4월 그믐 전에 임금께 진상해 들이는데, 그 심고 기르기가 매우 어려움으로 성종(成宗) 초에 없애 버렸다. 은어[銀口魚]ㆍ황어(黃魚)ㆍ석류(石榴). 『신증』 죽전(竹箭).
【성곽】 읍성(邑城)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는 1천 4백 98자이고, 높이는 8자이며, 안에 우물 2개가 있다. 『신증』 홍치(弘治) 경신년에 돌로 다시 쌓았으며, 둘레는 3천 64자, 높이는 13자이고, 안에 3개의 우물이 있다.
【봉수】 부로산 봉수(夫老山烽燧) 남쪽으론 양산군(梁山郡) 원적산(圓寂山)에 응하고, 북쪽으론 경주 소산(所山)에 응한다.
【역원】 덕천역(德川驛) 현 남쪽으로 5리에 있다. 신원(新院) 현의 남쪽으로 5리에 있다. 저촌원(猪村院) 현의 남쪽으로 24리에 있다. 우천원(于川院) 현의 북쪽으로 11리에 있다. 석남원(石南院) 석남산 아래에 있다. 보통원(普通院) 현의 동쪽으로 1리에 있다.
【불우】 석수사(石水寺) 부로산에 있다. 연고사(連高寺) 고헌산(高巘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의 북쪽 7리에 있다. 여단 현의 북쪽에 있다.
【인물】 고려 김취려(金就礪) 벼슬은 시중(侍中)에 이르렀고, 사람됨이 절조있고 검소하며 정직하였다. 충(忠)과 의(義)를 스스로 지키고, 군사 다루기를 엄하고 질서 있게 하여 사졸들이 조금도 범하지 못하였다. 술이 있으면 곧 잔 하나를 가지고 가장 낮은 자에 이르기까지 함께 고루 나누어 마셨다. 그러므로 그들의 죽을 힘을 다하는 충성심을 얻을 수 있었다. 강동(江東)의 싸움에 있어서도 일을 모두 조충(趙沖)에게 양보했으나, 싸움에 당하여 적을 제어할 때에 이르러서는 기발한 계락을 많이 내어 큰 공을 성취하였다. 그러나 일찍이 스스로 자랑한 적이 없었다. 정승이 되어서는 낯빛을 엄정히 하고, 아랫사람을 거느리니 누구도 감히 속이질 못했다. 시호는 위열(威烈)이다. 김문연(金文衍) 사람됨이 활달하며 오활하고 꼬부라진 것이 없었다. 여러 번 벼슬하여 첨의중호(僉議中護)에 이르렀다. 시호는 영신(榮信)이다. 김변(金賆)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첨의참리(僉議參理)에 이르렀고, 성품이 순후하며 사치함이 없었고, 정도로 공사를 다루었다. 김윤(金倫) 변의 아들로, 충열왕(忠烈王) 때, 합단(哈丹)이 내침하여 나라 사람들은 강화도(江華島)로 들어가 피했는데, 윤의 외숙 허공(許珙)이 김윤으로 하여금 가족을 데리고 먼저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윤이 나이 비록 14살이었지만 지휘함이 어른과 같아서 일족들이 힘입었다 한다. 음관(蔭官)으로, 여러 번 승진하여 경상ㆍ전라도의 도순문사(都巡問使)의 직에 임명되어 합포(合浦)를 진수하였는데, 호령이 엄격하고 분명하여 관리며 백성들이 편안하고 화목하였다. 충목왕(忠穆王) 때, 좌의정에 올랐으나 얼마 안 되어 사직하고 물러갔다. 후에 왕이 충혜왕(忠惠王)의 시호를 청하고자 윤을 불러 보내려 하였는데, 윤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신은 늙어서 72살이옵니다. 길에서 쓰러져 밝으신 명령을 욕되게 할까 두렵사오나, 목숨이 아직도 붙어있으니, 감히 힘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러 나와 행장을 정돈하고 원 나라에 가려 하였었다. 그런데 갑자기 풍질(風疾)에 걸려 10일 동안 물과 국물을 마시지 못하더니, 주위 사람들한테 부축하여 일으켜 달라 하고는 의관을 갖추고 단정히 앉아서 죽었다. 시호는 정열(貞烈)이고, 벼슬은 수사도 상주국 언양배(守司徒上柱國彦陽伯)에 이르렀다.본조 김자(金赭) 병신년 복시(複試)에서 장원했다. 벼슬은 참판에 이르렀다
【효자】 고려 신계은(辛繼誾) 부모상을 입고 전후 6년을 여막에서 거처했다. 정종문(鄭宗文) 부모가 잇따라 죽자 슬퍼하여 몸을 축냄이 예절보다 지나쳤고, 여막에서 3년을 거처하였다. 정상인(鄭尙仁)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조부모를 위하여 묘 옆의 여막에서 3년을 거처했으며, 모든 장례며 제례에 있어서는 한결같이 가례(家禮)에 따랐고, 또 그의 스승 길재(吉再)를 위하여 심상(心喪)으로 3년을 지내니, 사람들이 모두 경복하였다.
【열녀】 본조 정씨(鄭氏) 신령현(新寧縣)의 감무(監務) 유혜지(柳惠至)의 아내로서, 혜지가 죽자 3년을 여막에서 거처하였으므로 태종(太宗) 조에 마을에 정려하였다.
【제영】 산수반회작일향(山水盤廻作一鄕) 홍여방(洪汝方)의 시에, “소나무 대나무가 가리고 비쳐서 천 집을 숨겨 주고, 산과 물이 서리고 돌아서 한 시골을 만들었다.” 하였다. 근곽산고다모애(近郭山高多暮靄) 이지명(李知命)의 시에, “성에 가까이 산이 높으니 저녁 노을이 많고, 처마에 이웃하여 나무가 빽빽하니 가을 맛이 나네.” 하였다. 대우신하첩수량(帶雨新荷疊水凉) 권맹손(權孟孫)의 시에, “바람 머금은 붉은 작약은 뜰에 번득여 연약하고, 비에 젖은 새 연잎 물 위에 포개있어 서늘하다.” 하였다. 산형북공라도거(山形北拱羅都去)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산 형세는 북으로 신라 서울 끼고 뻗어 있고, 물 형세는 동으로 울산(蔚山) 바다에 기울어져 흘러가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선조 32년에 울산에 합하였다 왜구의 소탕으로 잔피하여서였다. 광해주 4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방면】 상북(上北) 동북쪽으로 끝이 20리이다. 중북 북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33리이다. 상남 서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30리이다. 중남 남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20리이다. 하남 서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30리이다. 삼동(三同) 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30리이다.
【성지】 취서산고성(鷲棲山古城) 산 위에 있었는데 단조성(丹鳥城)이라 일컬었다. 둘레가 4천 50척, 읍 성문이 4척이고 못이 하나 있다.
【토산】 석류.
[주-D001] 강동(江東)의 싸움 :
강동의 싸움은 중국의 금(金) 나라가 쇠약하여 망하는 틈을 타서 예전 거란의 유족들이 일어나서 동진국(東眞國)을 건설하였으나 다시 신흥하는 몽고족에 쫓기어 우리 나라로 몰려 왔으므로 그것을 방어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