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곧 일본돈 만 엔의 안물이 될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명언을 소개합니다.
(이등박문 out)
대한제국에
1명의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있었다면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얘기가
왜정기 일본에 있었습니다
♥ 시부사와의 명언1
"사십, 오십은 코흘리개,
육십, 칠십은 한창 일할 나이다,
아흔이 되면 백까지 기다리라고
쫓아내라"
♥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명언2
『꿈 칠훈,
"꿈 없는 자는 이상이 없고
이상 없는 자는 신념이 없고,
신념 없는 자는 계획이 없고
계획 없는 자는 실행이 없고
실행 없는 자는 성과 없고
성과 없는 자는 행복이 없고,
고로
행복를 구하는 자는
먼저 꿈 꾸어야 한다"
● 시부사와 에이이치
Shibusawa Eiichi, 渋沢 栄一
근대 일본의 대표적인 사업가, 은행가로 메이지시대 정부관리로 있으면서 개혁정책을 수립하고 제일국립은행과 시부사와회사를 설립하여 일본 근대경제를 확립하는데 기여하였다.
● 출생 - 사망 1840.3.16 ~ 1931.11.11
● 국적 일본
● 출생지
일본, 사이타마현(埼玉県), 후카야시(深谷市)
'일본 경제의 아버지'라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메이지시대에 정부관리로 있으면서 개혁정책을 수립하고 후에 일본 최초의 은행인 일본제일국립은행(현재의 다이이치칸교은행)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시부사와 회사를 설립하여 일본의 근대경제 확립에 기여하였다.
1840년 사이타마현 후카야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적 아버지로부터 유학을 배웠고 그의 삼촌에게서 일본의 역사를 배웠다.
청년시절 에도막부시대 마지막 권력가였던 요시노부 쇼군 집안에서 재무를 담당하였으며, 양이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7살이 되던 해에는 프랑스 만국박람회 참가 요원으로서 유럽을 방문하고 유럽의 금융제도와 산업에 관해 공부하였다.
유럽에서 돌아와 메이지 정부의 재무성 관리로 제도의 개혁을 수립하였다.
1873년 관리를 그만두고 제일국립은행을 설립하고 초대 총재로 은행을 관리하였으며 은행에 대해 잘 몰랐던 일본인들을 위해 은행사무강습소를 설치하여 교육과 은행보급에도 힘썼다.
후에 상당수의 다른 은행설립에도 관여하여 최초의 은행설립가라기 보다 일본의 근대적인 금융제도를 설립했다는 데에 더 큰 의미가 있다.
또한 제조회사를 만들었는데
1873년 처음으로 종이 제조회사를 설립했고, 운수회사, 방적회사, 비료회사 등을 설립하였으며 청일전쟁 후 일본의 국제화를 위해 해운과 철도, 시멘트, 석유, 가스, 전기, 조선, 광산, 토목, 제강, 보험, 신탁 등 제조업과 기간산업, 금융업에 이르기까지 일본 자본주의의 경제적 기초를 확립하는데 기여했다.
산업기반에서 필요한 인재 육성을 위해 실업교육에도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아 도쿄상과대학,도쿄고등상업학교, 이와쿠라철도학교 등을 설립하고 발전시키는데 노력했다.
일본사회의 개혁과 변화의 선구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1931년 11월 91살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네이버 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