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벨기에(Belgium)에서 태어난
예쁜 한 소녀가 있었다.
정치적인 문제로 집을 나간 아버지를
피해 소녀와 그의 어머니는 네덜란드와
영국을 떠돌며 가난하게 살았다.
아사(餓死) 직전에 이웃에게 발견돼
겨우 목숨을 건졌는데...
그녀를 살린 것은 유니세프
(유엔아동기금)의 구호 빵 한 덩이었다.
그렇게 위기를 극복하고
성장한 소녀는 세계적인
영화배우가 되었는데...
그녀가 바로 오드리 햅번
(Audrey Hepburn, 1929~1993) 이다.
"어린이 한 명을 구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어린이 백만 명을 구하는 것은 신이 주신 기회입니다."
그녀는 유니세프 친선대사
로서 전 세계 어린이들을 위해 열정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그녀의 헌신적인 희생덕분에 유니세프(UNICEF)에 기부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녀는 아래와 같은 유언을 아들에게
남기고 63세의 일기로 아름다운
생을 마쳤다.
-★ 오드리 헵번이 아들에게 남긴 유언 ★-
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싶으면 친절하게 말하라.
사랑스러운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보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네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눠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 하루에 한번 어린이가
손가락으로네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으면 너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하며 걸어라
사람들은 상처에서 치유되어야 하고
낡은 것에서 새로워져야 하며
병에서 회복되어야 하고
무지함에서 교화되어야 하며,
고통에서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결코 누구도 버려서는 안 된다.
기억하라.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다면 네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한 손은 자기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삶을 돕는 손이다♥
아들은 Sean Hepburn Ferrer (born July 17, 1960~) 입니다. 영화 제작자.
♥★☆ 오드리 햅번의 생애 ★☆
브뤼셀의 익셀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린 시절을 벨기에, 영국 및 네덜란드에서 보냈다. 암스테르담에서 소니아 가스켈과 발레를 공부한 후 1948년 런던으로 건너가 마리 램버트와 발레 수업을 계속했다. 그후 웨스트 엔드(West End) 뮤지컬 극장에서 코러스 걸로 활동했다.
몇몇 영화에서 단역으로 출연한 후, 프랑스의 소설가 콜레트의 주목을 받았다. 1945년에 발표된 콜레트의 소설 지지(Gigi)를 원작으로 한 1951년의 브로드웨이 연극에서 주연을 맡았다. 이후 《로마의 휴일》(1953)에서 주연(앤 공주 역)을 맡아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아카데미상, 골든 글로브상 및 BAFTA상을 수상한 첫 번째 배우였다. 같은 해 헵번은 장 지로두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연극 옹딘에서 토니상 연극부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사브리나》 (1954), 《파계》 (1959), 《티파니에서 아침을》 (1961), 《샤레이드》(1963), 《마이 페어 레이디》 (1964), 《어두워질 때까지》 (1967)와 같은 성공적인 여러 영화에 출연했다. 아카데미상, 골든 글로브 및 BAFTA(영국 아카데미 영화상) 후보에 지명되었다. 1967년까지 BAFTA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세 번 받았다. 영화에서의 경력을 인정받아 BAFTA에서 평생 공로상, 세실 B. 드밀 상(Golden Globe Cecil B. DeMille) , 미국 배우 조합상 공로상 및 토니상 특별상(Special Tony Award)을 수상했다 . 아카데미상, 에미상, 그래미상 및 토니상을 받은 12 명 중 한 명이다.
나이가 들면서 헵번은 적은 수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나중에 만년의 삶 대부분을 유니세프에 헌신했다 . 1954년부터 조직에 기여했으며 1988년부터 1992년까지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아시아의 가장 가난한 나라의 공동체에서 일을 했다. 1992년 12월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하면서 대통령 훈장을 받았다. 1개월 후 스위스의 자택에서 대장암으로 투병 끝에 고인이 되었다. 1989년에 햅 역으로 출연했던 《영혼은 그대 곁에》(원작 : Always)가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