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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의사

박서양은 백정의 아들로 한국 최초의 의사 중 하나입니다.
물론 이 최초라는 것은 서양의학을 공부한 의사를 이야기합니다.

최초의 의사이기도 하지만 그가 백정의 아들이라는 것은 굉장히 놀라운 일이었죠.
당시는 아직 조선 시대로 신분제가 남아있던 시기니까요.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박서양이 의학을 공부한 제중원(후에 세브란스병원)이 서양의 의료선교사들에 의해서 주도적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입니다.

박서양의 아버지는 백정 박성춘이었습니다.

그는 콜레라에 걸려 죽음을 목전에 두었었는데 에비슨 의료선교사가 그를 치료해주었습니다.
박서양은 아들 박서양이 백정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천주교 학교와 예수교 학당에 보냈습니다.

박성춘은 에비슨에게 박서양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부디 아들을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당연히 에비슨은 거절하지만 끈질긴 그의 부탁에 우선 그를 병원에 데려다가 온갖 잡일을 시킵니다.
박서양은 무슨 일이든 불만없이 성실히 잘 해내었습니다.

이를 지켜본 에비슨이 박서양을 의학반 과정에 입학할 수 있게 도와주게 됩니다.
그것이 1900년 8월 박서양이 고작 15살 때 일입니다.

백정 박성춘은 후에 은행가가 됩니다.

신분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백정이 되었지만 변화하는 역사 속에서 자식만은 달리 크기를 원했고 자신 또한 영민했던 그는
결국 당시 숙명이라고 생각되었던
신분의 굴레를 벗어나게 된 거죠.

박서양의 성실함은 제중원 의학반 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났고 1908년 6월 이들이
졸업 할 때는 7명의 졸업생 중 구두시험과 실기시험에서 가장 좋은 점수를 받고 의사가 되었습니다.

박서양은 졸업 후에 중앙학교, 휘문학교, 오성학교 등에서 화학을 가르치고
세브란스 간호원양성소에서 해부학등을 가르치며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그러다 1917년 학교를 그만두고 간도에 구세의원을 개업합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유일한 병원이었기에
1년에 그가 보는 환자는 1만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가난한 사람들이어서 그 중 1/3이 무료 진료를 받았다고 하니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박서양은 독립운동에도 적극 동참해서 군의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1940년 55세로 광복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게 됩니다.

오랜 시간 박서양은 잊혀져오다가 2008년 건국포장을 받게 되고 드라마로 만들어지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게 되었습니다.

사람대접 못 받던 어릴 적 이름은 ‘개새끼’
의사 박서양은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백정의 아들이 의사가 됐다’라는 정도로만 구전돼왔을 뿐, 지금껏 그의 진가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최근 들어 그가 세상에 알려지고 제 가치를 인정받은 데는 연세대 의대 박형우(54·해부학교실) 교수의 숨은 노력이 큰 몫을 했습니다.

박 교수는 박서양의 일대기를 사료 고증을 통해 밝혀내 논문으로 엮었으며, 그가 쓴 ‘제중원’이라는 책은 드라마의 모티프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박 교수가 드라마의 의학 자문을 맡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박서양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만약 드라마의 내용을 미리 알고 싶다면
박서양의 일대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박서양의 어릴 적 이름은 ‘소근개’로
근수가 적게 나가는 개, 즉 ‘개새끼’라는 이름입니다.

그만큼 당시 백정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
했습니다. 최하층 신분인 박서양이 의사가 된 것은 박서양의 아버지 박성춘과 제중원 의사 에비슨(O. R. Avison·제중원 4대 원장)의 ‘운명적 인연’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박성춘을 에비슨이 신분을 차별하지 않고 헌신적으로 치료했기 때문.

이에 깊은 감명을 받은 박성춘은 기독교로 개종하고 그를 스승처럼 따랐다고 합니다.

콜레라도 박서양이 의사가 되는 데 한몫했습니다. 1895년 6월 콜레라가 만연하기 시작하자 조선 정부는 에비슨을 방역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에비슨의 노력 끝에 콜레라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조선 정부는 에비슨에게 감사를 표했고,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방 백정들의 해방을 탄원했습니다.

박성춘을 비롯한 다른 백정들의 탄원도 함께 제출됐습니다.

결국 1896년 2월 백정들에게도 면천(免賤)이 허용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즉, 박서양에게 의사가 될 길이 열린 것입니다.

박서양은 결혼 이후 본격적으로 의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에비슨은 박서양의 결혼식장에서 “아들놈을 병원으로 데려가 사람 좀 만들어 달라”는 박성춘의 부탁을 받고도 제중원의학교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박서양을 병원으로 불러 청소, 침대 정리 등 온갖 궂은일을 시켰습니다.

박서양이 힘든 일을 아무 불평 없이 처리하자 에비슨은 비로소 그에게 의학 책을 읽게 했습니다. 뒷날 밝혀진 일이지만 에비슨은 박서양의 사람됨을 알기 위해 일부러 그를 시험했습니다.

결국 박서양은 다른 6명과 함께 1908년 졸업시험을 통과해 한국 최초의 의사면허를 받았습니다.

박형우 교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의학 공부에서 필요한 덕목은 ‘성실성’으로, 박서양의 인간됨을 알아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만주 무대로 의료 활동, 동아일보 기자로도 활약
학교를 졸업한 박서양은 모교 제중원의학교의 전임교수로 화학, 해부학 등을 가르치며 외과 환자를 진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의사로서의 안락한 삶에 안주하지 않고 돌연 간도로 이주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구세병원과 숭신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또한 간도 지역의 조선인 자치기구이자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국민회에서 군의(軍醫)로 임명돼 의료를 담당했습니다.
박서양은 이때 동아일보 간도지국 기자로도 활약했습니다.

만주를 무대로 독립운동에 힘쓰던 박서양은 1936년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박형우 교수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 간도에서의 독립운동이 사실상 어려워지고, ‘불온사상을 고취한다.’는 이유로
그가 설립한 숭신학교가 폐교 당하자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며
“이미 50대가 돼 여생을 고향에서 보내고 싶었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박서양은 광복을 5년 앞둔 1940년 55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영면했습니다.

박서양의 일대기는 2006년 박형우 교수의 논문 ‘박서양의 의료 활동과 독립운동’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박서양의 업적이 뒤늦게 밝혀진 것에 대해 박 교수는
“최근 독립운동사 자료에 대한 접근이 쉬워진 덕에 박서양이 간도에서 활동한 내용을 개략적이나마 확인할 수 있게 됐습니다.

또한 박서양의 손자 박연수 씨가 2005년 연세대학교를 방문했을 때 입수한 호적등본 등 여러 자료와

당시 ‘동아일보’ ‘신동아’의 기사도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합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몸소 실천한 대의(大醫)
2008년 광복절을 맞아 박서양은 ‘건국포장’을 받고 독립유공자로 추서됐습니다.

박형우 교수는
“첫 의사면허를 받은 7명 중에서 4명이 독립유공자”라며 “수많은 조선의 엘리트들이 근대 지상주의의 미명 하에 일제 침략을 용인했던 것과는 달리, 이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하며 대의(大醫)의 모습을 보여준 지식인”이라고 설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