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물트럭 몰던 남편이
덜컥 병에 걸렸다.
아내가 운전을 배워
서울~부산을 일주일에
3번씩 함께 왕복한다.
신장병을 앓고있는 남편은
시속 100㎞ 트럭 속에서
하루 4번 투석을 하곤
곯아 떨어진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차창을 타고 흘러내린다.
밤 11시,
이은자(55)씨가 운전하는
4.5ton트럭이 영동고속도로
하행선 여주 부근을 달린다.
이씨는 몸이 아담해
운전을 한다기보다
운전대에 매달려
가는 것 같다.
트럭이 차선을 바꾸자
운전석 뒤편에 매달린
링거 팩이 흔들거린다.
남편인 심원섭(53)씨가
누워서 복막 투석을
하고 있다.
시속 100㎞로 달리는
트럭 속에서 투석은
30분 만에 끝났다.
10년 전부터 신장병을
앓고 있는 심씨는 하루 네 번씩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투석을 한다.
투석을 마치자마자
심씨가 코를 골며 잠들었다.
“시끄럽지요?
하지만 저 소리가 나한테는
생명의 소리예요."
가끔 코고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손을 뒤쪽으로
뻗어 남편의 손을 만져 본다.
곤하게 잠든 남편,
고맙고 또 고맙다.
부부는
일주일에 세 번씩
서울과 부산을 왕복한다.
수도권지역
공단에서 짐을 받아
부산 지역에 내려놓고,
부산에서
짐을 받아 서울로
가져온다.
원래는 남편이
혼자서 하던 일.
하지만 5년 전부터
아내가 함께 다닌다.
렌터카·택시·버스,
안 해본 운전이 없는 경력 35년
베테랑 운전사인 심씨는
1995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뇌졸중이 나아질 무렵
다시 심장병으로
6차례 수술을 받았고,
신장병까지 겹쳤다.
사업은 망가졌고
고단한 병치레 끝에
자녀들과도 사이가
멀어졌다.
아들 둘, 딸 하나 가운데
막내아들(28)을 제외하고는
연락도 하지 않는다.
“출가한 큰딸과
아들에게는 더 이상
손 벌리기가 미안해
연락도 못해요.
저희끼리 잘 살길
바랄 뿐이죠.”
아내 이씨가
한숨을 내쉰다.
운전석 옆에서
남편 수발을 들던 이씨는
2004년 아예 운전을
배웠다.
몸이 아픈 남편과
운전을 교대로 하기로 했다.
트럭이 안산공단에 들어서자
남편이 운전대를잡았다.
좁고 복잡한
시내 길은 남편 심씨가,
고속도로 같은 쉬운 길은
아내 이 씨가 운전을 한다.
낮에는 지방에서
전날 밤 싣고 온 짐을
안산·반월공단 공장을 돌며
내려놓는다.
해질 녘이 되면
쉬지도 않고 지방으로 가져갈
물건을 싣는다.
저녁 7시쯤
경기도 안양에 있는 집에
눈붙이러 잠시 들렀다.
남편은 집까지
걸어가기가 힘들다며
그냥 차 안에서 쉬겠다고 한다.
아내만 혼자
어두운 골목길을 따라
집으로 향한다.
이틀 만에 돌아온 집은
온통 빨랫감과 설거지 감으로
발 디딜 틈도 없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
막내아들 뒤치다꺼리도
이씨 몫이다.
집안 청소를 마친 이 씨는
무너지듯 쓰러진다.
“좀 쉬었어?”
밤 10시,
짧은 단잠을 자고
돌아온 아내에게
남편이 한마디 던졌다.
무뚝뚝한 남편 앞에서
이 씨는 말없이 트럭에
시동을 걸었다.
밤 12시. 어느새
중부내륙 고속도로로 접어들자,
뒤에 누워 있던 남편이 눈을 뜨며
라면이라도 먹고 가자고 했다.
충북 괴산휴게소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트럭을 세워놓고,
이 씨가 트럭 옆에서
라면을 끓였다.
남편은
다른 사람이 끓인 라면을
먹지 못한다.
신장병을 앓고 있는
환자 특유의 입맛 때문이다.
라면으로
허기를 달랜 부부가
다시 트럭을 몬다.
새벽 2시쯤
경부고속도로 칠곡
휴게소에 도착했다.
휴게소 한쪽에
차를 주차시킨 뒤
남편이 운전석 뒤편
남은 공간에 전기장판을
깔고 눕는다.
아내는 운전석에
나무합판을 깐 뒤
잠을 청한다.
뒤쪽 공간이
조금 더 따뜻하고
편하긴 하지만
한 사람이 누워도
몸을 뒤척일 수 없을 만큼 좁다.
“이렇게라도
함께 잘 수 있어 좋습니다.
꼭 신혼 단칸방 같지 않나요?”
남편 심씨가 애써 웃는다.
새벽 4시,
캄캄한 어둠속에
트럭이 다시 출발했다.
새벽 6시 전에
톨게이트를 통과해야만
통행료 50%를 할인
받을 수 있다.
고속도로는
경부고속도로에서
구마고속도로로 바뀐다.
심 씨 부부가
이틀 동안 10여 차례
고속도로를 바꿔 타며
돌아다닌 거리는
1200여㎞.
한 달 수입은
기름 값, 통행료 제외하고
350만 원 정도다.
일감이 없는 날도 많다.
트럭 할부금으로
매달 180만원, 심씨 약값으로
50만원이 들어간다.
정부에서
6개월마다 기름값
보조금 명목으로 150만원이
나오지만 남은 돈으로
생활하기에는 빠듯하다.
“그래도 약값이라도
나오니 다행이지요.
남편 몸이 조금 나아져
같이 다닐 수 있는게
행복이라면 행복이고요.”
가속 페달을 밟는
이씨의 표정이 밝다.
부부는
구마고속도로 김해
진례톨게이트를 빠져나와
길가에서
1시간 정도 쉰 다음
톨게이트 화장실에서
세수를 했다.
김해공단에 이르자
남편이 다시 운전석에
앉았다.
짐을 부리고,
남해고속도로는 다시
아내 몫.
부산 녹산공단과
해운대에서 남편이
또 운전대를 잡았다.
옆자리로 옮겨 앉은
아내는 쉬지 못한다.
몸 아픈 남편에게
말도 붙이고 팔도
주물러준다.
녹산공단과
해운대 등을 돌아다니며
포장지, 전선 보호막,
철근 등을 내려주고 다시
서울로 향한다.
서울로 올라가는
경부고속도로 상행선.
아침이 밝다.
“피곤해도
자동차 타고 여행 다니는
심정으로 일하지 뭐!
일 때문에
고생한다고 생각하면
더 힘들어지는 거 아냐?”
남편과 아내가
손을 손을 꼭 쥐었다.
너무 감동적이서 퍼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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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도에서
43년 동안 한센병 환자를 보살펴 온
외국인 수녀 2명이
편지 한 장 달랑 남기고 떠났다.
소록도 주민들은
이별의 슬픔을 감추지 못한 채
일손을 놓고 성당에서 열흘 넘게
두 수녀님을 위한 기도를 드리고 있다.
소록도에서 평생을 환자와 함께 살아온
마리안(71) 그리고 마가레트(70) 수녀가
고국인 오스트리아로 떠난 날은
지난달 21일이었다.
마리안 수녀는 1959년에,
마가레트 수녀는 1962년에
소록도에 첫발을 디뎠습니다.
두 수녀는
장갑을 끼지 않은 채 환자의 상처에
약을 발라줬습니다.
또 외국 의료진을 초청해
장애교정 수술을 해 주고
한센인 자녀를 위한 영아원을 운영하는 등
보육과 자활정착사업에 헌신했습니다.
정부는 이들의 선행을 뒤늦게 알고
1972년 국민포장,
1996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습니다.
두 수녀는 이른 새벽
아무도 모르게 섬을 떠났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은인들에게’ 란
편지 한 장만 남겼습니다.
편지에서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우리들이 있는 곳에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동료들에게 이야기해 왔는데
이제 그 말을 실천할
때라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또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 감사하며
저희들의 부족함으로
마음 아프게 해 드렸던 일에 대해
용서를 빈다”고 했습니다.
김명호 소록도 주민자치회장은
“주민에게 온갖 사랑을 베푼
두 수녀님은 살아있는 성모 마리아였다”며
“작별인사도 없이 섬을 떠난
두 수녀님 때문에
섬이 슬픔에 잠겨 있다”고 말했습니다.
43년간 소록도에서 봉사활동을 한
마가레트 수녀와 마리안 수녀는
오스트리아 간호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소록도병원이 간호사를 원한다는 소식이
소속 수녀회에 전해지자
1962년과 66년 차례로 소록도에 왔습니다.
환자들이 말리는데도
약을 꼼꼼히 발라야 한다며
장갑도 끼지 않고 상처를 만졌습니다.
오후엔 손수 죽을 쑤고
과자도 구워서 바구니에 담아 들고
마을을 돌았습니다.
소록도 사람들은
전라도 사투리에 한글까지 깨친
두 수녀를 ‘할매’라고 불렀습니다.
꽃다운 20대부터 수천 환자의
손과 발이되어 살아 왔는데,지금은
일흔 할머니가 됐습니다.
숨어서 어루만지는 손의 기적과,
주님밖엔 누구에게도
얼굴을 알리지 않은 베품이
참 베품임을 믿었던 두 사람은
상이나 인터뷰를
번번이 물리쳤습니다.
10여년전 오스트리아 정부 훈장은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가
섬까지 찾아와서야 줄 수 있었습니다.
병원 측이 마련한
회갑잔치마저 '기도하러 간다'며
피했습니다.
두 수녀는 본국 수녀회가 보내 오는
생활비까지 환자들 우유와 간식비,
그리고 성한 몸이 돼
떠나는 사람들의
노자로 나눠줬습니다.
두 수녀의 귀향길엔
소록도에 올 때 가져왔던
해진 가방 한 개만
들려 있었다고 합니다.
외로운 섬,
버림의 섬,
건너의 섬에는
두 성녀가 다녀가신 곳인가요.
상처받은 사람들을
반세기 가깝게 보살핀
두 수녀님의 사랑의 향기는
민들레 씨앗처럼 바람에 날려
어두운 곳을 밝히고
추운 세상을
덥혀 주리라고 믿습니다.
이제는 70세가 된 마리안 수녀님
"처음 왔을 땐 환자가 6000명이었어요.
아이들도 200명쯤 되었고,
약도 없고 돌봐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한사람 한사람 치료해 주려면
평생 이곳에서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
이 두 분은 팔을 걷어붙이고,
환자들을 직접 치료하기
시작한 것이 40년이 된 것입니다.
할 일은 지천이었고,
돌봐야 할 사람은
끝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40년의 숨은 봉사...
이렇게 정성을 쏟은
소록도는 이제 많이 좋아져서,
환자도 600명 정도로
크게 줄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알려질 까봐,
요란한 송별식이 될까봐
조용히 떠나셨습니다.
두 분은 배를 타고 소록도를 떠나던 날,
멀어 지는 섬과 사람들을 멀리서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고 했습니다.
20대부터 40년을 살았던 소록도였기에,
소록도가 그들에게는 고향과 같았기에,
이제 돌아가 고향 오스트리아는
40년 세월이 흐른 지금
오히려 낯선 땅이 되었습니다.
지금
수도원 3평 남짓 방 한 칸에 살면서
소록도가 그리워
방을 온통 한국의 장식품으로 꾸며놓고
오늘도 '소록도의 꿈'을 꾼다고 했습니다.
그 분의 방문 앞에는
그분의 마음에
평생 담아두었던 말이
한국말로 써 있다고 합니다.
'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라.
"지금도 우리 집,우리 병원 다 생각나요.
바다는 얼마나 푸르고 아름다운지...
하지만 괜찮아요.
마음은... 소록도에 두고 왔으니까요!"
헌신하신 두 수녀님께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