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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원근우

♣ 무원근우 ● (3월13일 실버 방송)

향토사학자 이양훈 님이 고전 속의 교훈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1. 오늘은 어떤 얘기를 하시겠습니까?

(이) 오늘은 무원근우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2. 무원근우 무슨 뜻인가요?

(이) 무원근우는 없을 無, 멀 遠, 가까울 近, 근심憂입니다.

그뜻은 멀리 생각지 않으면 가까운 미래에 근심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원래 인무원려(人無遠慮) 필유근우(必有近憂)의 줄임말입니다.

즉 사람이 먼 앞날에 대한 헤아림이 없으면 가까운 장래에 근심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무원근우는 옛날 동양사상가들 간에 자주 논쟁 화두가 되었습니다.

3. 무원근우는 어디에 나오는 말입니까?

(이) 논어 15편 위령공에 나오는 말입니다. 위령공은 2,500년전 춘추시대 황하 강변에 있던 중간 규모의 나라 위나라 군주였는데 위령공 때 나라 형편이 복잡했습니다.

위나라는 이웃 대국인 나아갈 晉자 진나라와 원수가 되고 태자가 계모를 죽이려다 실패하자 적국 진나라로 달아나는 등 복잡했습니다.

그래서 위령공은 공자를 초대해 좋은 도움말을 들었는데 그 때 공자가 한 말이 무원근우입니다.

4. 무원근우를 우리나라 옛사람들도 잘 알고 있었겠군요?

(이) 그렇죠. 이 무원근우 화두에 관해서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명합니다. 다산은 실학자이었지만 동양고전의 초기정신 고찰에도 뛰어나셨습니다.

다산은 무원근우의 遠은 먼 미래, 近은 곧 닥칠 급박함이라고 했습니다. 즉 사람들이 눈앞의 이익만 구하고 곧 닥칠 사태만 처방하니 장차 닥칠 더 큰일을 막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한순간의 반짝 이득을 얻을 일에 몰두하지 말고 지금 손해를 보더라도 먼 후일에 얻을 더 큰 이득을 전망하여 부디 멀리 또 넓게 보라고 하였습니다.

5. 멀리 넓게 보라고 했군요.

(이) 그렇습니다. 다산은 훗날을 바로 예측키 위해서 넓은 세상을 보라고 했습니다. 또 다산은 일시적인 성공에 자만하거나 일시적 실패에 좌절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오늘의 실패가 향후 성공의 바탕이 된다고 했습니다. 즉 근시안적 일희일비를 경계했습니다.

6. 요즘 이슈인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해결도 무원근우 아닐 까 싶군요?

(이) 그렇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도 원려가 부족한 무원에서 근우, 즉 가까운 근심으로 생긴 것입니다. 원려하여 완벽한 방역대책을 세워 두었다면 이 사태를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과학이 부족했던 옛사람들도 전염병 전파를 우려하여 미리 전염병 환자를 수용할 병막을 고을마다 고을 밖에 외진 곳에 미리 만들어 두었습니다.

즉 격리치료 대책이 있었죠. 이 병막골이 요즘 모두 백마골이 되었는데 오늘의 코로나바이러스 대책에도 격리했지만, 시행이 늦었습니다.

7. 요즘 세계가 넓고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 세계가 함께 방지대책을 세워야 할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어땠습니까?

(이) 옛사람들은 그런 점을 언급했습니다. 송나라의 문장가 소동파는 려부재 천리지외(慮不在千里之外)요, 즉환재 안석지하의(則患在 安席之下矣)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생각이 천리밖에 미치지 않으면 우환이 앉은 자리 밑에서 생긴다는 말입니다.

당시 누가 소동파에게 물었습니다. 불필요한 것을 그토록 미리 앞당겨서 생각할 필요가 있느냐? 하니 소동파는 ‘사람이 길을 걸을 때 발을 딛는 곳 외에는 필요없는 땅이지만 그 땅을 버릴 수 있겠는가?’되물었습니다.

8. 옛 사상 무원근우는 재난대응책 같기도 합니다.

(이) 그렇습니다. 무원근우에 관련하여 중국의 명나라 초기 인물로서 강직하기로 소문난 방효유가 남긴 유명한 말이 그의 문집 주례변정에 있습니다.

그 말은 禍常發 于 所忽之中(화상발 우 소홀지중)이요, 而 亂常起 于 不足疑之事(이 난상기 우 부족의지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재앙은 언제나 소홀하게 다룬 데서 발생하고, 난은 언제나 의심이 부족한 데서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즉 작은 문제도 소홀하지 말고 큰 관심을 갖자는 말입니다.

9. 방효유는 그렇게 살았습니까?

(이) 그는 원칙론자니까 자신의 원칙대로 살았습니다. 방효유는 우리 사육신의 모델이 된 인물입니다.

그가 45세때인 1402년에 후일 영락제가 되는 연왕이 반란을 일으켜 왕위찬탈을 한 뒤에 그의 즉위에 대한 발표문인 즉위조를 방효유에게 지으라고 하자 방효유는 연왕 앞에서 나는 죽어도 못 쓰겠소 하고 붓을 내던져 참살당했습니다.

이 방효유로부터 54년 뒤인 1456년 세조2년에 단종 복위에 목숨을 바친 인물들이 우리 사육신인데 그들도 방효유를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10. 그런 중국이 코로나바이러스의 발원지가 된 것은 유비무환이 부족했나요?

(이) 그런 것 같습니다. 과거 중국의 심원한 사상이 오늘까지 미치지 못한 것도 같습니다.

11. 중국지도자 중에 등소평 같은 이는 중국고전을 자주 인용하였다죠?

(이) 그렇습니다. 등소평이 가장 즐겨 쓴 성어가 ‘病已成 而后 藥之(병이성 이후 약지)요, 亂已成 而後 治之(난이성 이후 치지)’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병이 나타난 뒤에 약을 쓰고 난이 일어난 뒤에 이를 다스린다고 했습니다.

12. 듣기에 평범하고 당연한 말 같군요?

(이) 그렇게 들립니다만 이 말을 한 등소평의 속내는 반대였습니다. 즉 병이나 난이 나기 전에 조치하라는 유비무환을 위해 이 말을 하였습니다.

즉 조짐이 보일 때 대비하는 것입니다. 사태가 터진 뒤의 차선책 실행에는 많은 인력과 재정이 소요되므로 조기에 진화하라는 것이 등소평의 뜻입니다. 사회주의는 효율이 떨어지는 체제니까 이를 극복하기 위해 ‘병이성 이후 약지, 난이성 이후 치지’를 등소평이 말했습니다.

13. 중국은 우리와 붙어 있고 같은 동양 한자문화권이어서 코로나바이러스도 함께 해결할 수밖에 없다 싶군요?

(이) 그렇습니다. 중국사상에 우환의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환의식은 이번 코로나바이러스와 같은 우환이 발생하면 중국만의 우환이 아닌 주변국의 위기와 곤경도 책임지고 해결한다는 사상으로 중화사상의 중요부분을 이루고 있습니다.

400년 전 임진왜란 때나 150년 전 임오군란 때 중국이 개입한 것에 이 우환의식이 깔려 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14. 그런데 이 무원근우 원문인 인무원려(人無遠慮) 필유근우(必有近憂)는 안중근 의사와 관련이 있다면서요?

(이) 그렇습니다. 여순감옥에서 순국하신 안중근 의사가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일본인 교도관에게 써준 휘호가 이 글이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왜 이 글을 써주었을까? 생각해보면 일본이 가까운 이웃 나라를 침략하는 근우를 하지말고 세계를 보는 원려를 하라는 충고였습니다.

또 안중근 의사가 유교 경전에 밝았다는 사실도 알려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