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학규 초량왜관 남색 동향사 ♥
(5월15일 방송)
이양훈의 부산이야기입니다. 향토사학자 이양훈PD님이 부산의 역사와 관련한 이야기를 들려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1. 오늘은 어떤 얘기를 들려주실 건가요?
(이) 오늘도 유배문인 이학규 애기를 하겠습니다. 1801년의 유명한 천주교 박해 사건인 신유사옥으로 한양에서 김해로 유배온 이학규가 부산나들이를 자주 하였고 초량왜관에 들어가서 초량왜관사 자료를 남겼는데 이 자료는 200여년 전 초량왜관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입니다.
2. 그러면 당시 유배 선비 이학규의 기록에 나타난 초량왜관은 어땠나요? 왜관에 여자는 있었나요?
(이) 초량왜관은 여자가 전혀 없는 남자들만의 공간이었습니다.
평상시에 약 500명의 왜인 남자들이 머물렀고 무역을 하는 팔송선이나 조선통신사를 수행 영접할 호송 선원들이 오면 최대 1천 명 정도까지 머물렀던 초량왜관이었습니다.
이 모두가 남자였으니 왜인들은 늘 금욕스럽고 조심스럽게 살았습니다.
3. 왜관은 남자들만의 공간인데 좀 삭막하고 거칠지는 않았나요?
(이) 그들 왜인들은 늘 조선인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므로 내부를 늘 아름답게 가꾸려 노력했습니다.
이학규는 초량왜관을 묘사하여 別院 回廊 人見稀요, 菱花小槅(격) 紫金輝라 하였습니다.
그 뜻은 “별원의 회랑에 사람 보기 어려워라, 실내에 마름꽃 무늬 격자 칸막이는 보라와 금색으로 아름답게 칠하였네.” 읊었습니다.
왜관의 70여동 건물들은 비를 피할 수 있게 대부분 서로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실내는 격자창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가구로 곱게 치장되어 있었습니다.
4. 그 속에 살고 있을 왜인들의 풍속도 우리와 다를텐데 이학규는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이) 왜관은 작은 일본이었습니다. 이학규는 왜인들의 이런저럼 습속을 예리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학규는 초량왜관사에서
“深春 苦憶에 鴛鴦鬼”이며 “覓箇 妖童은 與解衣”라 썼습니다. 그 뜻은 “한창 봄날에 고뇌의 원앙귀신이여. 몰래 찾아온 요동은 옷을 벗는다”입니다.
아학규는 이 구절 아래에 주석으로 “일본에서는 처녀가 원앙 귀신이 되는 경우가 많다”라고 달았습니다.
5. 그게 무슨 뜻인가요? 의아스럽네요?
(이) 이것이 재미있는데 원앙귀는 여자가 결혼 후에 낭군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홀로 한숨 속에 사는 여인을 말합니다.
그러면 왜 이 젊은 신부가 원앙귀가 되었을까? 그 답은 다음 구절에 있습니다. 요동은 남색이 대상이 되는 미소년을 멀합니다.
즉 남편은 아내를 버려 두고 같은 남자 미소년을 불러서 밤을 함께 보낸다는 뜻이죠.
6. 그것은 동성애쟎아요?
(이) 그렇죠. 남자들만의 동성애입니다. 초량왜관에서 왜인들은 동성애를 하였습니다. 남자들만 모여 있으면 자칫 동성애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예로부터 이를 금기시하였고 최근에 이를 사랑으로 인정하는 추세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이 동성애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중도라 하여 인정하였습니다.
7. 초량왜관 내에서의 동성애, 전혀 몰랐던 사실이네요?
(이) 왜관내에서의 동성애를 보는 다른 측면도 있습니다.
1607년에 생겨 71년간 지속된 두모포 왜관 50년과 초량왜관 198년 역사에 왜인들은 조선 여인에 대해서 성적인 범죄를 거의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 동성애에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들끼리 서로 사랑하니 조선 여인을 탐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유명한 초량여인 애금 사건 같이 매춘이 발각되어 왜인은 추방되고 애금이 처형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만 비교적 초량왜관이 조용했던 것은 이 남성간의 동성애 때문이었습니다.
8. 일본인들에게 동성에는 자연스런 풍속이었군요?
(이) 그렇죠. 일본인들에게는 풍속이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 풍속을 중도라 했습니다.
대중이 행하는 풍속이란 뜻이죠. 중도의 대상이 되는 미소년을 치아라 하였는데 우리는 이 중도를 남색이라 하였고,
그 대상이 되는 미소년을 요동이라 하였습니다. 요동이란 말을 지은 사람은 1719년 제9차 조선통신사행에서 제술관으로 일본에 간 신유한이었습니다.
그가 오사카에서 陰間茶屋이란 건물들을 보았습니다.
일본말로 카게마 쨔야라는 이 건물들은 카게마, 즉 남창을 두고 남자손님을 받는 사창가였습니다. 예쁘게 단장한 미소년들이 지나는 남자손님을 유혹하는 것을 보고 그 미소년들을 요사스런 요동이라고 기록한 것이 시초입니다.
9. 조선통신사들이 일본에서 남창들을 만났군요?
(이) 그렇습니다. 당시 사행의 신유한 제술관은 이 남창들을 주제로 시를 지었으니 남창사였습니다. 그 남창사 내용을 보면,
신유한이 일본에 머물 때에 그에게 일본 막부가 촌춘, 촌우라는 두 여자 기생을 붙여 주었고, 그가 이 기생들을 만나기 위해 길을 가다가 질투심에 불탄 남창 미소년 요동들이 나타나 길을 막았다고 했습니다.
그 때 요동들은 화려한 비단 옷을 입구 귤향기를 풍기며 손님들을 유혹했다고 제술관 신유한은 기록하였습니다.
10. 남색이 일본의 풍속으로 보편적이었나 보군요?
(이) 그렇습니다. 일본인들은 예로부터 성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큼 관대했습니다.
뒤에 나오는 애기지만, 초량왜관에 근무하는 대마도의 대관이 자신이 없는 사이에 처가 아이를 임신하고 낳았습니다.
우리로서는 대경실색할 일이지만 왜인 대관은 그 아이까지도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이더라는 것입니다.
이 남색도 특이한 일본의 성문화입니다.
전국시대에 일본 다이묘들은 누구나 남색 대상인 미소년 치아 요동을 두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당시 일본 속담에 아내는 범해도 용서할 수 있지만 자신의 총애하는 치아를 범하는 것은 용사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누가 치아를 건드리면 그와 사생결단으로 싸우는 것이 일본 무사들의 관례였습니다.
남색은 초량왜관이 생긴 이후 늘 존재해왔고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관수든, 대관이든, 스님이든 예외 없이 남색을 하였습니다.
11. 그러면 조선통신사로 간 우리나라 사람들이 말리지 않았나요?
(이) 더러 말렸죠. 그러면 왜인들의 답이 이랬어요.
“당신 조선인들도 한번 해보시오. 참 재미있습니다.” 하고 권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성문화는 우리에게도 한 때 있었습니다. 김대문이 지은 화랑세기를 보면 신라 때의 성문화가 난삽하게 나옵니다.
그들 일본인들이 신라시대에 건너간 우리 고대의 한국인들이기에 그런거지요.
그래서 일본의 가족 규범과 제도를 강화하기 위해서 임진왜란 후에 덕천가강이 받아 들인 것이 조선 주자학 퇴계학이었습니다.
온갖 욕심을 멀리하고 자기단속을 철저히 하는 퇴계학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일본은 인간해방에 가까운 율곡의 성리학은 받아 들이지 않고 퇴계학을 받아 들였고 지금도 퇴계학은 일본 정신 문화의 골간이 되어 있습니다.
12. 그 외에 이학규는 왜관 내의 어디를 갔죠?
(이) 다음으로 그가 간 곳은 왜관 내의 사찰 동향사입니다. 동향사는 외교문서의 수발을 담당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동향사 주지는 한문에 능해야 했고 일본 대표 불교 종단인 오산 종단에서 가장 유능한 스님을 보냈습니다.
이학규는 “常時 頂禮 在沙門이고 墨色 袈裟 坐具尊”이라 하였으니 “늘 큰 절로 부처님께 엎디어 예배하는 스님이 여기에 계시구나.
그 법의가사는 조선과는 달리 흑색이고 모든 불구가 갖추어 있네.”라고 들여다 본 동향사 내부를 묘사하였습니다.
또 “接住 後堂 深悄悄(심초초)하니 外人 誰得 到庭垣(정원)”이라 하였습니다.
“주지가 머무는 후당은 깊고 고요하니 외부인이 어찌 감히 엿볼 수 있을까” 읊었습니다.
13. 고요한 사찰의 모습을 잘 읊은 것 같습니다.
(이) 그렇죠. 동향사는 입구 대문인 수문을 들어서면 오른쪽 용두산 언덕의 숲속에 있었습니다.
동향사 뜰에 서면 부산만 전부가 내려다 보이고 멀리 오륙도도 보였습니다. 이 동향사에서 유명한 것이 동향월출, 즉 보름날 밤에 뜨는 부산만의 달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이 동향월출은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다고 초량왜관을 찾아온 일본의 옛 시인들은 격찬하였습니다.
14. 지금도 용두산에 오르면 아름다운데 옛날에는 더욱 아름다웠으리라 여겨집니다.
(이) 그렇습니다. 18세기에 동래의 화가 변박이 그린 초량왜관도를 보면 동향사는 한 동의 건물로만 나옵니다만 약 100년 전의 인물로서 초량왜관을 연구하고 “종가와 조선”이라는 책을 낸 다카하시 쇼노스케(高橋章之助)는 동향사가 세 동의 건물로 이뤄져 있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을 모신 법당이 한 동, 주지 거처와 요사채가 각기 한 동씩 있다고 했습니다.
이 다카하시의 서술은 이학규의 초량왜관사와 일치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