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거정(徐巨正)의 태화루 중신기(重新記)에 이르기를,
“내 일찍이 남도(南道)에 놀다가 두루 이름난 곳을 찾아 누(樓)로는 촉석(矗石)ㆍ영남(嶺南)ㆍ명원(明遠)ㆍ영호(暎湖)ㆍ쌍벽(雙碧)을 보았고, 대(臺)로는 해운(海雲)ㆍ월영(月影)ㆍ관어(觀魚)를 보았는데, 참으로 이른바 기이하고 특이한 경치 좋은 곳이었다.👬
맨 마지막으로 장차 울산으로 가고자 하는데 대화루(大和樓)의 경치가 좋단 말을 듣고 한번 오르고 싶었다. 🐦
울산 강에 이르러 한 누각을 바라다보니, 층층으로 언덕과 끊어진 절벽 위에 높다랗게 서있어 푸른 물결을 내려다보고 있는지라, 그 웅장한 것을 사랑해서 물으니 대화루라고 한다.
강을 건너자 배를 버리고 지팡이에 의지해서 누각 아래 이르러 보니, 기둥과 대들보가 우두커니 서 있노라니, 종사(從事) 이세우(李世佑)공과 유계분(柳桂芬)ㆍ이인석(李仁錫)ㆍ사천(泗川) 양희지(楊熙止)ㆍ지례(知禮) 정석견(鄭錫堅)이 나를 부축해서 억지로 올라가서 기둥을 의지해서 잠시 앉았다. 🎴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니, 그 경치가 내가 전에 본 누대들과 비슷한데 광원(曠遠)한 것은 오히려 이곳이 나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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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내가 생각하니
설곡(雪谷) 정선생(鄭先生)이 부(賦) 팔영(八詠)을 지었고, 가정(稼亭) 이선생(李先生)이 우리 외조(外祖)에게 화답한 글이 있으며, 양촌(陽村) 권선생(權先生)의 기(記)가 또 있었는데, 제판(題板)을 쳐다보니 지금은 모두 없었다.
🚆
조금 있다가 누에서 내려와 다시 땅에 앉아 술 몇 잔을 마시면서 내가 제군들에게 말하기를,
‘누의 경치가 이와 같은데 전후에 이곳 원이 되었던 사람으로 영웅 호걸이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거늘, 아무 한 사람도 새로 지을 생각을 하지 않고 지금까지 내려왔단 말인가. 하물며 설곡ㆍ가정ㆍ양촌 세 선생의 시와 기문은 모두 이 누(樓)를 위해서 빛나는 글들이라. 마땅히 등왕각(滕王閣)의 삼왕(三王)보다 못지 않거늘, 이제 어찌 차마 없애고 전하지 않는단 말인가.’ 하고,💺
내가 또 웃으며 말하기를,
‘옛사람 중에 황학루(黃鶴樓)를 망치로 두드려 부수려한 사람도 있으니, 이제 누를 새롭게 하지 못한 것도 이 누(累)에 연좌된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다행히 풍류와 문아가 있는 여러 선생들과 함께 이 누에 왔으나 올라가서 글을 써보지 못하니, 이는 마치 희문(希文)이 악양루(岳陽樓)에서, 최호(崔灝)가 황학루에서, 조하(趙嘏)가 위남루(渭南樓)에서, 왕반산(王半山)ㆍ곽공보(郭功甫)가 봉황대(鳳凰臺)에서 붓을 던지고 돌아갔다는 것과 같으니,
또한 살풍경(殺風景)이라 이르지 않겠는가.’ 하니
⚫제군들이 또한 크게 웃었다.
🔹 이튿날 개운포(開雲浦)를 향해서 돌아오니
절도사 설무림(薛茂林) 또한 왔었다. 🔴
이 때는 바야흐로 7월 16일이라 달빛이 정히 아름답다. 또 제군들과 함께 배 하나를 띄워 만경 물결을 업신여기고 술잔을 들어 서로 권해서 그윽이 소동파(蘇東波)의 적벽(赤壁) 놀이에 비교하니 저번 날에 왔을 제 불쾌했던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
서울로 돌아오자 지나간 일을 생각하여 다시 가슴 속에 오락가락 했었다.
지난해에 양사천(楊泗川)이 나에게 말하기를,
‘울산은 내 고을로서 지금 원[宰] 박후(朴侯)가 고을을 위하여 잘 다스려서 정치가 이미 잘 닦아지고 폐단이 이미 없어졌으며, 관부와 누관도 점차로 수선했습니다. 지금은 대화루도 중수(重修)해서 크고 넓은 데 새로이 칠을 하여 옛날보다 더욱 아름다워졌으니, 선생께서 전일에 보실 때에 이 누에 흠이 있던 것이 지금에 이르러서 조금도 결함이 없으니, 원하건대 선생은 글을 지어 주시옵소서.’ 한다.⭕
내가 듣고 기뻐하여 말하기를, ‘박후의 어진 것이 전 원보다 더 낫도다.’ 했었다.👗
그 뒤에 남쪽에서 오는 자들은 모두 울산이 정치가 잘 된다는 것을 칭찬하고, 또 이 대화루의 장관을 탄복하니, 나는 더욱 박후가 잘 다스린다는 말을 믿게 되었다.
💍아, 옛날 등왕각을 중수했을 때에 한퇴지(韓退之)가 기문을 지었는데, 이제 이 대화루는 비록 경치가 좋으나 나의 글이 퇴지에 미치지 못하거늘, 부끄러움을 모르고 기문을 지으니, 그 미치고 참람됨을 알겠도다. 🐞그러나 내가 태사(太史)의 장(長)으로 있으면서 박후의 잘 다스린다는 말을 들었으니, 이것을 써서 뒷사람에게 보이지 않을 수 없도다. 🌳누의 좋은 경치에 대해서는 지금의 문인이나 고상한 선비가 반드시 잘 말하는 이가 있겠기로 여기서는 말하지 않노라.
내가 만일 다시 한번 남쪽에 가서 놀아 박후와 함께 한 번 올라가게 된다면 마땅히 잔을 들고 붓을 잡아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다할 것이다.⛄
박후의 이름은 복경(復卿)이요, 자(字)는 세휴(世休)이니, 일찍이 무과(武科)에 뽑혀 안팎에 여러 벼슬을 거쳐 당시의 칭찬이 있었다고 한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