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타이타닉

💺🚎🚲🚓🚘
타이타닉호 침몰 뒤에 감춰진 이야기🗼🚤🚣🚉

당시 생존자인 부선장은 오랜 세월 침묵 끝에 드디어 사고 당시의 이야기를 공개했습니다.

1912년 4월 14일은 공포의 날이었습니다. 사고로 1,514명이 사망했고 710명이 구조되었습니다. 🐥

사고 당시 38세였던 타이타닉호의 이등 항해사  찰스·래히틀러 씨는 구조된 승객을 책임지기 위해 선원 중 유일하게 구조된 승무원이었습니다.

아래는 찰스·래히틀러 씨의 타이타닉호 참사의 자세한 사정을 담은  17페이지 분량의 회고록입니다.

선장은 침몰을 앞두고 여성과 아이를 먼저 구조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많은 여성승객들이 가족과의 이별 대신 남아있기를 선택했습니다.🐦

저는 높은 소리로
‘여성과 아이들은 이리 오세요!’라고 불렀지만, 가족을 버리고 혼자 구명보트에 오르려는 여성과 아이는 몇 명 없었습니다.

래히틀러는
‘살아 있는 동안 그 밤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겁니다!’
라고 말합니다.

첫 구명보트가 바다로 내려가고, 저는 갑판 위에 한 여성에게 말했습니다.🐢

“부인, 어서 구명보트에 오르세요!”

그녀는 뜻밖에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아니요, 저는 배에 남겠어요.”

이 말을 들은 여성의 남편이

“그러지말고 어서 타세요! 여보!”
라고 말하자,
여성은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습니다 🐎

“혼자 가지 않겠어요. 당신과 함께 이 배에 남을거에요.”

그것이 제가 본 그 부부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애스터 IV(당시 세계 최고 부자) 씨는 임신 5개월 된 아내를 구명보트에 태워 보내며 갑판 위에 앉아, 한 손에는 강아지를 안고 다른 한 손에는 시가 한 대를 피우면서 멀리 가는 보트를 향해 외쳤습니다. 🐚

‘사랑해요 여보!’

승객들을 대피시키던 선원 한 명이 애스터 씨에게 보트에 타라고 하자,
애스터 씨는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사람이 최소한 양심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남은 한 자리를 곁에 있던 한 아일랜드 여성에게 양보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배의 파편들에 의해 찢겨진 애스터 씨의 시신을 생존자 수색 중이던 승무원이 발견했습니다.🐙

그는 타아타닉호 10대도 만들 수 있는 자산을 가진 부호였지만, 살아남을 수 있는 모든 기회를 거절했습니다.

자신의 목숨으로 양심을 지킨 위대한 사나이의 유일한 선택이었습니다.

성공한 은행가였던 구겐하임 씨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순간에도 화려한 이브닝드레스로 갈아 입으며 이처럼 말했습니다.🐣

“죽더라도 체통을 지키고 신사처럼 죽겠습니다.”

구겐하임 씨가 아내에게 남긴 쪽지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었습니다

“이 배에는 나의 이기심으로 구조받지 못하고 죽어간 여성은 없을 것이오. 나는 금수만도 못한 삶을 살 바에야 신사 답게 죽을 것이오.”🐐

미국 메이시(Macy’s)백화점 창업자 슈트라우스 씨는 세계 2번째 부자였습니다.

그가 어떤 말로 설득해도 아내 로잘리 씨를 구명보트에 태우지 못했습니다. 🐊
아내 로잘리 씨는

“당신이 가는 곳에 항상 함께 갔어요. 세상 어디든지 당신과 함께 갈 거예요”

라며 남편을 두고 배에 오르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8번 구명보트의 책임 선원이 67세의 슈트라우스에게

“누구도 어르신이 보트를 타는 것을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며 구명정 탑승을 권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슈트라우스 씨는 단호한 말투로

“다른 남성들보다 먼저 보트에 타라는 제의는 거절하겠습니다”

라며 생사의 순간에도 초연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

그리고 그는 63세의 아내 로잘리 씨의 팔을 잡고 천천히 갑판 위의 의자에 앉아 최후의 순간을 기다렸습니다.⛄

현재 뉴욕 브롱크스에 슈트라우스 부부를 기리는 기념비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있습니다.🌵

‘바닷물로 침몰시킬 수 없었던 사랑.’

프랑스 상인 와트열 씨는 두 아이를 보트에 탄 여인들에게 부탁하고 배 위에 남아 아이들과 작별했습니다.🍁

두 아들은 이렇게 구조되었고 세계 각지의 신문사들이 어머니를 찾을 수 있도록 연달아 사진을 실어주어 어머니와는 재회할 수 있었지만, 배에 남겨진 아버지와는 다시는 볼 수 없었습니다.

남편과 미국으로 신혼여행을 떠난 리더파스는 남편을 꼭 껴안고 혼자 살아남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남편은 주먹으로 그녀를 기절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신이 돌아왔을 때 그녀는 이미 바다 위에 떠 있는 구명보트 안이었습니다.🍄

그녀는 평생 재가하지 않았으며 남편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리스 로잔의 생존자모임에서 스미스 부인이 자신에게 자리를 양보한 여성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시 제 두 아이가 구명보트에 오르자, 만석이 돼서 제 자리는 없었습니다. 이때 한 여성분이 일어나서 저를 구명보트로 끌어당기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올라오세요. 아이들은 엄마가 필요합니다!”

그 대단한 여성은 이름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

사람들은 그녀를 위해 ‘이름없는 어머니’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희생자 중에는 억만장자 아스테드, 저명 신문가 헴스테드, 육군 소령 바트, 저명 엔지니어 루오부어 등 사회의 저명인사가 많았지만, 이들 모두 곁에 있던 가난한 농촌 부녀들에게 자리를 양보했습니다.🐑

타이타닉호의 주요 승무원 50여 명 중 구조를 책임졌던 이등 항해사 래히틀러 외 전부 자리를 양보하고 배와 함께 생을 마감했습니다.

새벽 2시, 각자 도망가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1번 연산사 존·필립스는 여전히 전산실에 앉아 마지막 순간까지 ‘SOS’를 입력하며 자신의 보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선미가 물에 가라앉기 시작했을 때, 삶과 죽음의 마지막 순간, 사람들이 서로에게 외쳤습니다.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을 사랑해요!’🐰

그날, 우리 모두 위대한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줬습니다. 🌻

제가 당신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습니다.🌷
일본 철도원 차장인 호소 노텍스트 씨는 여장을 한 채 여성과 어린이들로 채워진 10번 구명보트에 올랐습니다.

그는 귀국 후 바로 퇴직당했습니다. 🌾

모든 일본 신문사와 여론은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했으며

그는 십여 년 뒤 후회와 수치로 가득 찬 삶을 마감했습니다🐁

1912년 타이타닉호를 기리는 자리에서 타이타닉호를 건조한 선박회사 White Star Line는 희생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성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해상 규칙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

단지 그들의 행동은 약자들에 대한 배려이자, 그들의 개인적인 선택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