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선인 2020. 6. 17. 21:21

장기려 장로[박사] 일화 세토막

1 ▲… 장기려 박사가 운영하는 청십자 병원에 한 농부가 입원했다. 이 농부는 워낙 가난해서 치료를 끝내고도 입원비가 밀려 퇴원을 할 수가 없었다. 생각다못한 농부는 장 박사를 찾아가 하소연했다.

“원장님, 모자라는 입원비는 돈을 벌어서 갚겠다고 해도 도무지 믿지를 않습니다. 이제 곧 모내기를 해야 하는데, 제가 가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환자의 사정을 들으며 생각에 잠겨있던 장 박사가 입을 열었다.

“밤에 문을 열어 줄 테니 그냥 살짝 도망치시오.”

그날 밤, 장 박사는 서무과 직원이 모두 퇴근한 다음에 병원 뒷문을 살짝 열어놓았다.

얼마 뒤 농부와 그의 아내가 머뭇거리며 나타났다. 어둠 속에서 장 박사가 농부의 거친 손을 잡았다.

“얼마 안되지만 차비요. 열심히 사시오.”

다음 날 아침, 환자가 사라졌다는 간호사의 말을 듣고 서무과 직원이 원장실로 뛰어왔다.

“106호 환자가 간밤에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장 박사는 겸연쩍은 듯이 웃으며 말했다.

“사실은 내가 도망치라고 문을 열어 주었소. 다 나은 환자를 병원에서 마냥 붙들고 있으면 그 가족들은 어떻게 살겠소? 이 과장도 알다시피 지금이 한창 바쁜 농사철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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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거제 보건원의 정희섭 원장은 장 박사가 월남해 왔을 때 부산 제3육군병원 원장으로 장 박사를 받아주었던 사람이다.

그런 인연으로 장 박사는 2주에 두번씩은 거제도에서 환자를 보기로 했다.

그가 오는 날은 병원이 장날처럼 붐볐다. 외딴 섬마을에서 오는 환자들은 바람이 불어 배를 탈 수 없을까 염려해 미리 병원 가까운 여관에 들기까지 했다.

손자가 수술을 받고 퇴원하던 날, 그 손자의 할머니는 손수건에 달걀 3개를 싸가지고 와서 장 박사의 손에 쥐어 주었다.

“선생님, 우리 삼대 독자를 살려주셔서 정말로 고맙습니다.”

장 박사는 그 순간 그 할머니의 얼굴에서 자신을 기도로 키워주셨던 친 할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할머니, 손자의 병은 제가 고친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조금 도와주었을 뿐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선생님이 수술해서 우리 손자를 안 살렸습니까?”

장 박사는 웃으며 이렇게 설명했다.

“할머니, 우리 몸에는 스스로 낫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 힘이 없으면 의사는 극히 작은 수술도 할 수 없습니다. 할머니는 칼에 손을 벤 적이 있으시지요?”

“예, 있지요. 피가 나지 않게 꼭 싸매두면 저절로 상처가 아물었습니다. 선생님 말씀은 알듯도 하지만 그래도 이상하네요. 우리 손자를 살리시고도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시니…”


3 ▲…하루는 장기려 박사가 외출을 위해 병원을 나서는데 나이 많은 거지 하나가 그의 옷을 잡았다.

장 박사는 여기저기 옷을 뒤졌지만 그의 호주머니에는 돈이 한 푼도 없었다.

갖고 있는 돈이 전혀 없다는 장 박사의 말에 거지 노인은 몹시 실망해 잡고 있던 옷자락을 놓았다.

돌아서 몇 걸음을 옮기던 장 박사는 갑자기 뒤돌아서서 거지 노인을 불러 세웠다.

그리고는 양복 주머니에서 월급으로 받은 수표를 꺼내었다. 장 박사가 수표를 건네주자 거지 노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종이 나부랭이가 돈이란 말이오?”

화가 나 돌아서려는 거지 노인을 장 박사가 붙잡았다.

“이것은 수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은행에 가면 돈으로 바꿔줄 겁니다.”

며칠 후, 장 박사가 운영하는 병원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여기는 은행입니다. 혹시 수표를 잃어버리신 일이 없으신지요?”

“아닙니다. 그런 일 없습니다.”

“웬 거지 노인이 박사님 사인이 된 수표를 가지고 왔는데요?”

“아! 그것 말이군.”

장 박사는 그제서야 며칠 전 거지에게 준 수표가 생각났다.

“그 수표는 내가 준 것이니 그리 알고 돈을 지불해 주시오.” 그러자 은행원은

“박사님이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이런 수표까지 거지에게 주시다니요…”

은행원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전화를 끊었다.

장 박사가 거지에게 준 수표 한 장, 그 수표가 얼마짜리인지는 수표를 준 장 박사와 그것을 받은 거지 노인, 돈을 지불한 은행원, 그리고 하나님만이 아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