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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석 장군 이야기

😓🚱 625 자투리 이야기 🎑🚳💝

625때인 1950년 12월
국군 박경석 소위에게 인간적인 대접을 해주고 놓아준 북한군 사단장의 정체는 누구였을까? 🐙
              
박소위는 국군에 귀대하자 바로 소대장직으로 원복해서 계속 전투를 이어갔다.

소대장 보임이 끝나자 부산 동래의 육군 종합 학교 구대장 요원으로 전출되어 바쁜 일정을 보내면서 자기가 싸웠던 북한군의 사단장의 정체는 물론, 그가 지휘하던 북 사단에 대한 정보를 입수할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

그렇게 세월이 가면서 박경석 장군이 입수한 정보는 1951년 1월 중순경 평창에 나타났던 적 부대는 북한군 4사단이라는 부정확한 것이었다. 북한군 4 사단은 북한군 최정예 사단으로서 의정부-미아리 축선을 돌파하고 서울을 최초로 점령했던 사단이었으며 오산에서 미 스미스 기동 부대를 격파했고 대전을 점령했었던 사단이었다.
        
그러나 낙동강 전선의 경남 창녕 영산에서 낙동강을 도강했다가 미 해병 1여단에게 제대로 걸려 부대 궤멸의 대 피해를 입고 소수만 살아남아 강 건너로 쫓겨갔다. 장비를 완전히 다 잃고 전상자도 많았던 정예 4사단은 9.28 수복 후 겨우 편제만 유지한채로 북으로 도망쳤다. 그 후 서해안 경비의 임무가 주어지고 다시는 전선에 나타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국군의 공식 전사가 1951년 국군 후방 깊숙이 침투했었던 북한 사단의 작전에 대한 전쟁사를 아주 허술하게 기록하는 실수를 했기 때문에 그 정체를 알기가 더욱 어려웠다.

박경석 소대와 전투를 했던 사단은 북한군 10사단이었다. 🌳

이 사단은 후에 인민 무력 부장을 했으며 현재 북한 실세인 최용해의 아버지인 최현이 지휘하던 북한군 5군단 소속이었다.
          
북한군 5군단장 최현. 김일성보다 다섯 살 많은 고참으로 한국 전쟁 무렵에도 김일성에게 "일성아!" "야 !자!" 하는 처지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김일성에게 꼬리를 내리고 아첨을 했다. 덕분에 은행 강도 출신으로 일자 무식이었지만 북한 인민 무력 부장을 지냈다.🌵
          
사단장은 32살의 전문섭 소장이다.
이 자는 한국에 한 때 김문섭으로 잘못 알려졌었다. 17세 박경석 소위에게 큰 감명을 주었던 자가 바로 이 자다. 1919년에 태어나서 1998년에 사망했고 북한군 대장까지 올라갔던 인물이었다.

1930년대 만주 남부에서 소위 유격대라는 것의 패거리 두목 김일성은 잘 생긴 외모와 유창한 언변으로 남만주 시골 일대에 일종의 아이돌 가수같은 신비한 인기를 뿌렸었다. 직업도 없고 교육도 없어 앞날이 어두웠던 만주 산골 거주 동포들의 빈곤 가정들의 10대들 상당수가 그 실체를 모르고 김일성 부대에 모여들었다. 요새말로 말하면 이들은 김일성 키즈들이었다.🚢

김일성은 정권을 잡고 연안파, 갑산파, 소련파들을 차례로 모두 숙청해버리고 빨치산 출신들만 권력의 주변에 남겨놓았다. 결국에는 빨치산 중에서도 부대 계열이 다른 항일연군 제2로군 최용건의 직계 부하들[김광협, 이영호 , 최용진]들도 다 내쳐버렸고 자기 계열의 부하들만으로 북한 정권의 권력 구조를 구성했다. 팔다리 다 짤린 최용건은 죽을 때까지 김일성 욕을 했지만 김일성은 나이가 훨씬 많은 이 대선배를 숙청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김일성의 연락병 출신으로 19년간이나 인민 무력 부장을 했던 오진우. 최현과 같이 김정일 승계를 옹호해주고 죽을 때까지 부귀영화를 누렸다.🐏
                
이중에서 김일성 키즈들은 끝까지 김일성과 김정일의 곁에 남아서 두 부자에게 충성한 골수 분자가 되었다. 10대 입산 무리들 중의 제일 신임했던 김일성 연락병 출신이고 인민 무력부장 오진우가 1917년생, 호위 총국장 리을설이 1921년생, 노농적위대 사령관 오백룡이 1913년생이니까 전문섭은 그 무렵 김일성 부대에 합류했던 젊은 세대의 한 패이기도 하다. 🈹

김일성 키즈중에 제일 나이 어린 것이 1928년 생으로 김정일 시대 총정치 국장을 했었고 미국에 가서 클린턴 대통령을 만났던 조명록이다. 그는 열살 남짓의 나이에 김일성 부대에 들어왔다.김일성 키즈들은 아주 오래오래 김씨 왕조 권좌에 붙어있었다  🌎

전문섭은 말년에 오진우, 리을설이나 오백룡등과 같이 김일성이나 김정일 주변에서 활동할 기회가 거의 없어서 우리한테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북한 전사에서는 이른바 명장,즉 군사적 능력이 높았던 지휘관으로 기록하고 있다.😍

전문섭은 6.25 전쟁 개시 춘천 전선에서 최초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춘천 방면에서 국군 6사단 7연대를 공격했다가 패퇴당했던 북한군 2사단의 참모장이었다.

대좌였전 그는 사단장 소련계 이청송 소장에게 군사적 조언을 했었으나 우유부단한 이청송은 옥산포 전투에서 패전했었고 여러 번 실기해서 춘천 점령을 사흘이나 지연시켰다.. 직후 이청송은 경질되었으나 전문섭은 연대장을 거쳐 북 10사단 사단장이 되었다.  🐢
북한군은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 뒤에 붕괴되어서 압록강으로 도주했었는데 중공군의 개입으로 기사회생했다. 압록강 남쪽에서 중공군의 여러 번의 매복 기습에 당한 국군과 유엔군은 철수할 수 밖에 없었고 중공군과 북한군 기세등등하게 추격해왔다        
🍁
1950년 12월 중순경 후퇴하던 유엔군과 국군이 과거 38선 부근에 정지해서 느슨한 방어선을 쳤을 때 군단장 최현은 10사단장 전문섭에게 국군 방어선을 뚫고 남하하여 국군 배후를 교란하는 사단 규모 유격전을 전개하도록 명령했다. 이 명령은 아마도 남진하던 중공군에게 질 수 없다는 김일성의 오기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박경석 장군은 수기에서 평창에서 자기 부대와 맞붙은 북한군이 연대 병력이라고 했지만 실병력은 휠씬 못 미치는 규모였다고 회고했는데 정확히 본 것이다.

그 무렵 낙동강 전선에서 붕괴되어 북으로 도망친 북한군은 병력을 대폭 잃어 사단은 여단 규모로, 여단은 대대 규모로 축소되어 있었다. 전문섭이 10 사단 병력을 남쪽으로 침투시켰다고 하지만 실제 병력은 단지 4,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전문섭은 1950년 12월 22일, 양구 방면에서 침투를 개시해서 국군 방어선을 똟고 주로 산을 타고 남하하여 며칠 후 200km 남쪽인 평창에 도달해서 여기에 일부 부대가 남고[아마 10 사단 사령부인듯] 다른 부대들은 더 남쪽, 남한 깊숙이 침투해왔다

전문섭의 북 10사단 행적 - 양구 쪽으로 침투해서 평창에서 사단 본부가 머물렀고 다른 주력들은 거기서 더 남쪽 문경과 안동선까지 남하 침투했었다.🌗
              
이들 남하 10사단 병력들은 지서를 습격하고 도로나 통신 시설물들을 파괴하고 소위 반동들을 학살하면서 남하했는데 그 일선 부대가 동쪽의 문경과 서쪽의 안동선까지 도달했었다. 침투 북한군의 활동으로 안동에서부터 그 북쪽 국군 3군단에 이어진 보급로가 차단되기도 하였었다.🍒

한반도의 중앙을 뚫고 침투한 이 게릴라 부대의 출현에 UN군 사령부는 매우 놀랐다. 전문섭의 사단이 여기저기 점으로 흩어져 설치고 다니는 바람에 그 추정 병력은 실병력보다 훨씬 더 많아 보였다.😡

미군은 1950년 7월, 호남 지방으로 우회해서 남해안에서 유엔군의 서쪽 측면을 찌른 방호산의 북한군 6사단을 양동 작전을 하는 연대 병력으로 과소 평가했던 덕분에 하동 전투와 마산 부근 진동 전투에서 큰 피해를 당한바 있어서 이번에는 단단히 대비했다.🎁
                      
전문섭 부대 토벌을 하며 북상했던 미 해병대는 화천과 펀치볼에서 전투를 하다가 서부 전선으로 이동했었다. 1951년 9월 펀치볼 부근의 미해병대가 군화를 벗고 계곡 물을 건너고 있다.
                
국군 9사단과 5사단을 투입하고 여기에 장진호에서 탈출해 나와 마산에 와서 재편성과 휴식을 하던 정예 미 해병 1사단을 북한 게릴라 부대의 토벌에 투입하였다. 여기에 일부 유엔군 벨기에 대대와 캐나다 대대들과 6,000명의 전투 경찰 부대까지 합세했으니 무려 6만5천명의 병력이 이 잡동사니 같은 무장을 한 소수의 부대 소탕에 붙잡혀 있었던 것이다.🚘

이 10사단 부대들은 주로 이 지역의 험한 산으로 도주하거나 이동했기 때문에 미 해병들은 소탕에 애를 먹어서 이들을 공수 보병[Airborne foot soldier]이라는 별명을 붙어주었다.👲

그러나 북한군 10단의 한 연대가 문경에서 미군에 10군단에 배속되어 북진했다가 돌아온 국군의 유엔 특별 공격대를 야간 기습했다가 대패한 이후 더 이상 큰 대규모 정규전을 도발하지는 않았었다.🚴
            
1951년 1월 13일 새벽부터 이틀간 문경 🏄🍟동로 국민학교🍟🎂 부근에서 있었던 국군 특별 공격대와 북한군 10사단의 혈전 - 결국 북한군은 패퇴했다.
                
북한군 10사단은 그 뒤 소규모로서 유격전만 하다가 침투 개시 두 달 만인 2월 23 일에 철수 명령을 받고 한달 간 축차적으로 북으로 철수해갔다.🌕

침투할 때 4,000명이던 북한군 10사단 중에 살아 돌아 온 북한군은 단지 1,000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전문섭 지휘하던 10사단의 활약은 지금도 북한의 전사에 중요하게 기록되어 있다.➕

비록 사단 병력의 4분지3을 잃고 돌아왔으나 북한군 10사단은 무려 6만 5천명의 UN군 병력을 후방에 묶어 놓고 남한의 후방을 휘저어대서 그들이 입었던 피해의 몇 배나 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박경석 소위의 부대가 북한군과 전투를 벌였던 때가 1951년 1월 15일이니까 그 때는 북한군 10사단 부대가 기세 좋게 남하할 때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