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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석 장군

朴慶錫 | Park Kyung Sok
박경석장군
🌗출생
1933년 1월 26일 (89세)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읍 본정
(현재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원리 88번지)
🌷거주지
대전광역시 유성구
🌵본관 밀양 박씨
🔃종교 개신교
🍁학력
대전고등학교 (졸업 / 31회)
🌳중앙대학교 사회개발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가족
형 박영석, 배우자 김혜린
🇰🇷필명
한사랑(韓史郞)
🚥경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소설가협회 이사
💃군사 경력
🍒임관
육군사관학교 (생도2기)
🌸복무
1950년 ~ 1981년
🐚최종계급 준장
📶최종보직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차장
👦주요보직
파월 제1진 맹호부대 제1연대 초대 在求大隊長(재구대대장)
제1보병사단 제12연대장
제6보병사단 작전부사단장
제3야전군사령부 인사처장
육군본부 기획처장
제1군단 참모장
대한민국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차장
🗿병과 보병

🏃참전
6.25 전쟁
베트남전쟁

🙅🌎⛅대한민국의 군인, 시인, 소설가이다. 육군사관학교 생도2기 출신으로 입교 직후 6.25 전쟁 참전했고, 베트남 전쟁 때 초대 재구대대장을 지냈으며, 대한민국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
1933년 1월 26일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읍 본정(현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원리 88번지)에서 태어났다. 이후 대전고등학교(31회)로 졸업하고, 17세의 나이에 청운의 꿈을 꾸며, 첫 4년제 정규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이때 우수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17세라는 나이로 인해 자격 미달이 되었지만, 같은 나이의 당시 헌병사령관으로 이승만의 총애를 얻은 원용덕의 자제 원창희의 육사 입교 압력이 육사 심사위원들에게 들어오자, 똑같이 나이제한으로 불합격한 박경석 생도도 원창희 생도와의 형평성 문제로 합격되었다.👄

입교 보름만에 6.25 전쟁이 발발했고, 노도와 같은 북한군의 남하를 막고자 박경석을 포함한 생도 2기생들은 채병덕 당시 육군참모총장의 어이없는 명으로 윗 기수인 육사 1기생과 함께 생도대대로 편성되어 포천 방면으로 이동, 내촌-태릉 전투를 치룬다. 그런데 졸업 및 임관이 머지않은 육사 1기와 달리 박경석을 포함한 육사 2기는 입교한 지 보름째로 기껏 소총 영점을 맞춘 수준이라 당장 실전에 투입될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은 당장 북한군을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채병덕 장군의 오판으로 전투에 투입되어 애꿎은 생도 절반이 전사했고, 낙오된 일부는 불암산 자락에서 게릴라 활동을 펼쳤다.🐙

이후 박경석을 비롯한 생존자들은 끊어진 한강 다리를 구사일생으로 넘어 후퇴, 임시 수도인 대전 원동 국민학교에서 1기 선배인 육사 10기생들의 철모에 일명 반창고 소위 계급장을 붙여 주며 눈물의 소위 임관식을 치러 주었다.육사 10기생의 눈물겨운 반창고 임관식과 비운의 육사 생도 2기생의 비화가 있었다  🔮

이후, 전장에서 더 많은 위관장교 자원을 필요로 하자 정부는 이들을 신설된 육군종합학교에 입교시켜 단기 교육 후 소위로 임관시켰다. 박경석도 이 때 임관된 초임장교 중 하나였다.🌏

이들은 생도 2기 출신 1명을 제외하고, 전부 새로 신설된 제9사단의 소대장으로 갔다. 그 1명은 당시 권력자였던, 원용덕 헌병 총사령관의 아들 원창희 소위였다. 원창희는 임관과 동시 후방의 부산역 파견 헌병대장으로 배속받았다.⛄

새로 신설된 9사단의 30연대 3대대 10중대 3소대장 보직을 받은 박경석은 여러 전투에서 생사를 넘나들었으며, 평창전투에서 수류탄으로 인한 피폭으로 부상당하여 부대에서 낙오, 한 번은 북한군에 잡혀 포로가 되었다. 🌳
박경석 소위가 포로로 잡힌 북한군 내에서는 박경석 소위를 비롯한 많은 한국군 장교포로들을 해방군관이라는 이름으로 전향시키려 했지만, 많은 이들이 이러한 북한군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았으며, 포로 생활도 도망가든 말든 자유로웠다고 한다.🐅

박경석은 포로 시절을 회고하며, 포로로 잡힌 북한군 사단의 사단장이 적이었지만, 그의 리더쉽에 감명 받았다고 한다. 부대에 식량이 떨어지면 사단장도 부하들과 함께 굶는 등의 리더쉽에 영향을 받아 뒷날 한국군내 정치군인이 판을 칠때도 그들의 회유와 압력에 굴하지 않고 참군인으로써 군인의 본분과 사명을 다하는데 계기가 되었다.🐍

한편 그가 포로 생활할 즈음 국군에서는 박경석이 전사한 줄 알고 가족에게 전사통지서 전달과 함께 전후, 현충원에 박경석 중위의 가묘를 설치해 기렸다. 물론 어찌어찌 생환해 나중에 자신의 묘지가 안장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지만, 파묘하지 않고 불의에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자신의 가묘를 찾아 마음을 다잡으며 자신의 생애가 다해 현충원에 안장되는 날 파묘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박경석 장군의 생존을 확인한 국립 서울 현충원에서 2020년 8월에 가묘가 철거되었다. 🐤

1951년쯤, 전쟁이 교착 상태가 되자, 이승만은 전쟁 초기 육사 생도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기려, 미 8군의 도움으로 육사를 재건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육군 수뇌부와 중위 신분이던 육사 생도 2기생들은 육사 생도 복귀를 놓고 논쟁하다가 결국은 새로운 모집 공고에 의한 육군사관학교 재건으로 전두환, 노태우등이 판을 치던 그 육사 11기생들이 첫 정규 4년제 육사 생도가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1950년대 후반부터 위관, 영관급 등 연간 100명의 장교들이 미국 포트 베닝 보병학교에 군사학 유학을 떠나는데, 여기서 배운 자유진영의 선진 군사학은 귀국 후, 전술 교관으로서 후배 장교들의 군사 지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한국군의 현대화에 있어 양적 팽창에 이어 질적 성장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후에 월남전에 대대장으로 참전하면서 전승 행진을 하는데 있어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65년 한국 정부는 미국의 요청과 월남의 파병 요청 형식으로 조문환 장군을 단장으로 하는 주월 한국군 군사원조단 비전투부대 비둘기부대가 파병되었고, 뒤이어 미국의 대 한국 군사원조 약조인 브라운 각서 체결과 야당의 반대 등 진통 끝에 전투병력의 파병이 결정되었다.🐡

이에 수도사단 내에 전 군의 고급 인력들을 모아 월남에 파병하기 위한 1진인 맹호부대가 창설됐고, 이에 박경석 중령도 1연대 재구대대의 대대장으로 부임해 강원 홍천에서 월남에 투입되기 위한 준비훈련을 시작한다.🐆

하지만 강재구 대위의 10중대가 훈련 도중 이등병 하나가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은 뒤 이를 놓치는 일이 벌어졌고,부임 전 부사관학교에서 수류탄 교관으로 있었던 그는 주저없이 수류탄을 덮쳐 일대의 중대원들을 살리고 현장에서 순직했다. 🌺그 뒤 박경석 대대장은 채명신 사단장에게 강재구 사건은 사고가 아니라 '살신성인'이라고 강하게 주장했고, 이에 채명신 사단장도 역시 재구상 재정에, 아예 부대 이름을 재구대대로 개명시키며 그를 기렸다.🐎

그리고 그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재구대대는 월남전에서 용감무쌍하게 싸워 세계 만방에 자랑스러운 한국군의 용맹을 빛내었다.

이후 월남에서 귀국 후, 대령으로 진급하여 1970년 8월 육군 제 1사단 12연대의 연대장으로 부임해 1사단 내 DMZ와 GOP 지역을 관할하게 되었는데 당시 휴전선 부근을 담당하던 미국 2보병사단 예하 4보병여단의 근무 지역을 인수 받았다. 🐲

이는 그동안 휴전선 지역을 관할하고 수비하던 미군의 임무를 한국군이 독자적으로 수행하는 계기와 선례가 되었다.

1972년 10월, 육군본부 인사운영감실 대령 과장으로 있던 박경석에게 당시 실세 중에 실세 육군 수경사령관 윤필용의 참모장 손영길이 찾아왔다. 🌿

육사 12, 13기 출신의 신참 대령들의 연대장 기용 청탁 쪽지였는데, 박경석은 이 쪽지의 명단의 인물들을 대차게 거절했다. 🐧

그에 대한 대가는 참혹했다.
한달 뒤, 박경석은 거의 확실시 되던 준장 진급에서, 진급에서 한참 밀리던 윤필용의 직속인 김성배로 준장 진급자 명단이 바뀌었다. 🍀

그후 2번이나 연거푸 준장 진급 누락 끝에 1975년에 간신히 진급이 된 박경석의 첫 보직은 6사단 부사단장 겸 DMZ 내에서 발견된 땅굴 특수개척팀장이었다.🌘

이후 박경석은 제1군단 참모장 직에 올랐으나 당시 제1군단장 양봉직 축출사건 당시 진종채 보안사령관의 사건 은폐 요청을 거부하였으며, 1980년에는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차장으로 영전됐다. ☔

사실 이 건 신군부 측의 회유에 가까운 영전이었는데 당시 인사참모부 차장이 겸임하던 자리는 육군공적심사위원장이었는데 당시 5.18과 12.12 당시 신군부 기준에서 공을 세운 장교들의 무공훈장 수여 심사 과제를 맡게 되었다.🌷

그러자 박경석은 소장으로 진급할 수 있었음에도 양심에 따라 이를 거부하고 1981년 7월 31일. 12.12 이후 개정된 인사법에 따라 1년 단축한 만기 육군준장 7년 정년으로 군복을 벗었다. 🌾

당시 전두환은 박경석을 국영기업체 감사로 임명했지만 박경석은 이를 거부하고 전업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

2020년 들어 논란이 되고 있는 백선엽(육군 예비역 대장)의 사후 현충원 안장과 관련된 논란에 대하여, "현행법이 그러니 현충원에 안장되는 건 어쩔 수 없겠으나, 후과가 클 것이다"고 경고했다.
🐠자신이 후손이라면 극구 만류할 것이라며 차라리 가족묘에 묻히는 게 낫지 않냐는 인터뷰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