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일제 🇯🇵식민지 때,
경북 안동에서 이름을 날리 던 파락호 중에
퇴계의 제자이자
영남학파의 거두였던 의성 김씨 학봉파의 명문가 후손으로서,
학봉 '김성일'종가
의 13대 종손
김용환(金龍煥, 1887년~1946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노름을 즐겼습니다.
당시 경북 안동 일대의 노름판에는 찾아다니며 끼었고 초저녁 부터 노름을 하다가 새벽녘이 되면 판돈을 다 걸고 마지막 배팅을 하는 주특기가 있었습니다. 🐝
만약 배팅이 적중하여 돈을 따면 좋고,
그렇지 않고 실패하면 도박장 주변에 잠복해 있던
수하 20여명이 몽둥이를 들고 나타나 판돈을 덮치는 수법을 사용했습니다. 🐥
판돈을 자루에 담고 건달들과 함께 유유히 사라졌던
노름꾼 '김용환'
그렇게 노름하다가 종갓집도 남의 손에 넘어가고 아내가 아이를 낳는 줄도 모른 채, 수 백 년 동안 종가 재산으로 내려오던
전,답 18만평 (현재 시가 약 400억 원) 도
다 팔아 먹고 아내 손을 잡으며,🚌
"미안하오. 이제 깊이 뉘우쳤소. 앞으로 달라 지겠소."
라는 약속도
얼마 안가서 다시 땅 문서를 들고 노름판을 찾았습니다.🐅
그렇게 팔아 먹은
전,답을 문중의 자손들이 십시일반 으로 돈을 걷어 다시 종가에 되사주곤 했습니다.🐘
“집안 망해 먹을 종손이 나왔다.”
고 혀를 차면서도
당시 양반 종가는 문중의 구심점 이므로 없어지면 안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급기야는 시집 간 무남독녀 외동딸이 신행 때 친정 집에 가서 장농을 사오라고
시댁에서 받은 돈 마저도 친정 아버지 김용환은 노름으로 탕진했습니다.🍃
딸은 빈손으로 시댁에 갈 수 없어 친정 큰 어머니가 쓰던 헌 장농을 가지고 울며 시댁으로 갔습니다.🌷
이정도이니 주위에서 얼마나 김용환을
욕했겠습니까? 🐐
'김용환'은 해방된 다음 해인
1946년 세상을 떠납니다.🚝
이러한 천하의 파락호이자 노름꾼 '김용환'이 사실은
만주에 독립자금을 댄 독립투사 였음이 사후에 밝혀 졌습니다.🌍
그 간 탕진했다고 알려진 돈은
모두 만주 독립군
에게 군자금으로 보내졌던 것입니다.🎃🇰🇷🇰🇷
'김용환'은
독립군의 군자금을 만들기 위하여
죽을 때까지 노름꾼, 망나니 파락호라는
불명예를 뒤집어 쓰고 위장한 삶을 살면서도 자기 가족에게 까지도 철저하게 함구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야 왜경놈들의 관심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 입니다.
임종 무렵에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독립군 동지가 머리맡에서,
“이제는 만주 독립군에 돈 보낸 사실을 이야기해도 되지 않겠나?”
라고 하자 🚽
“선비로서 당연히 할 일을 했을뿐인데
아무 말도 하지 말라”
는 말을 남긴 채 눈을 감았습니다.📗
일제시대 때
'김용환'의 할아버지
'김흥락'이 사촌인
의병대장 '김희락'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왜경에게 마당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보고 🇰🇷 나라를 되찾아야 겠다는 항일의 뜻을 품게 되었고,
평생을 철저하게
망나니 행세를 하면서 노름판을 전전하는 노름꾼 파락호로
위장했던 것 입니다.🇰🇷🇯🇵🇰🇷🇯🇵🇰🇷🇯🇵